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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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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은 보위부에서 담당해요. 보안서에서 수사하다가 정치범이라는 정황이 나오면 보위부로 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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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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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어라고 하면 무조건 열어야 해요. 보안원이든 보위지도원이든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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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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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지 몰라요. 저는 비밀 정보원으로 활동했어요. 주변 사람 그 누구도 제가 다른 사람을 감시하는지 몰랐죠. 제 존재가 밝혀지는 날에는 제 삶은 끝이라고 보면 돼요. 가족도 감시하고, 친구도 감시하고, 주변 사람 다 감시했으니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인간 관계가 끝나는 것이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어요. 누구도 모르게 행동해야 했고요. 그런데 보위부 통보원이라고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 사람도 일반 주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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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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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감시망이 아주 철저해요. 인민반을 예로 들면, 한 개 인민반 안에 보위지도원, 보안원이 다 파견되어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보위부, 보안서의 사주를 받은 밀정(정보원)들도 다 들어가 있죠. 즉, 누군가는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특정 인물이나 특이 행동을 보이는 사람에 대해 동향 보고는 보통 서면으로 이뤄져요. 정보를 캐기 위해 상대방과 평소처럼 친하게 지내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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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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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총회는 보안서에서 주관해요. 보안서에서 범죄자들을 무리로 끌고 나와서 어디 동이면 어디 동으로 가서 그곳 동사무소 앞에 세워 놓아요. 동사무소에서는 주민들에게 다 모이라고 하죠. 주민들 앞에 범죄자들을 세워 놓고 보안원이 ‘너는 이렇고, 너는 이렇고…’ 이렇게 다 폭로해요. 그렇게 한 후 다시 구류장으로 데려가요. 김일성이 살아 있던 때는 사상적으로 투철한 사람들이 많아서 주민들에게 모이라고 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참석했어요.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다 갔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다 무슨 상황 때문에 그렇게 잡혔는지 아니까, 이 사회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장사해서 벌어먹어야 하는 시간에 그곳까지 보러 오라고 하니까 잘 안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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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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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반은 동사무소 관할이에요. 동사무소는 시인민위원회 관할이고요. 위에는 도 인민위원회, 그리고 중앙인민위원회이죠. 북한은 중앙→도→시→군→리 이런 식으로 나가요. 한 개 인민반에 25~30세대가 있는데 그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인민반장의 말에는 절대 복종해야 해요. 그래서 인민반장이 힘이 세요. 주민들이 왜 인민반장을 무서워하는가 하면, 보안서나 보위부, 시당과 같은 곳에서 인민반장에게 와서 요해사업을 자주 해요. 즉, ‘이 세대는 어떤가?’, ‘저 세대는 어떤가?’와 같은 것들을 물어보는 거죠. 이 사람들의 생활이 어떤 지에 대해 물어보고 의견을 물어요. 국가적으로 하는 것에는 무조건 동의를 해 줘야 하기는 하지만, 형식상으로라도 인민반장의 도장이 찍힌 동의서는 있어야 해요. 그렇듯, 인민반장의 권한이 좀 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인민반장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런 식으로 보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것은 인민반장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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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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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총화에서는 자기 비판과 호상 비판을 해야 해요. 호상 비판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말해요. 옆에 있는 사람을 비판해야 하는데 정말 하기 싫어요. 하지만 자꾸 해라고 강요하죠. 어쩔 수 없이 해야 해요. 아주 사소한 것을 크게 말해야 하니까 힘들어요. 표현의 자유가 없어요. 그런 생각도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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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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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 죽이는데 누가 말하겠어요? 언론의 자유가 없어요. 제가 만약 북한에서 ‘우리나라 어찌 이러냐’ 이런 식으로 말했다 하면 저는 내일 아침이면 사라졌을 것이에요. 일단 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랑 말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제가 말 했다가 어느 누가 저를 고발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말한다는 말인가요? 누가 언제 어떻게 감시하고 있고 고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전부 다 감시해요. 특히 저 같이 한국에 자식들이 먼저 넘어 간 사람들은 주변의 감시를 더 많이 받아요. 개인 생각을 밖에 꺼낸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했어요. 괜히 한마디 했다가 모가지 날아가게 생겼는데 말을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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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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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언론은) 전혀 없어요. 북한에서 나오는 것들은 다 국가가 하는 것이에요. 노동신문은 김씨 일가 내용이 주로 나오고, 함북도신문은 함북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주로 나오고, 그런데 저는 신문을 자주 보지 않았어요. 볼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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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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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시사해설’이라고 교수인지, 연구소에 있는 사람인지, 언론하는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하는데 다른 나라, 한국이라든가, 그런 나라에 대해 예를 들어 '한국 광화문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시위는 뭘 안 해줘서 그런 것'이라는 내용으로 제 나름대로 해석하는 내용이 가끔씩 보도 식으로, 뉴스로 나왔어요. TV, 조선중앙방송에서 나왔죠. 그런데 북한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다른 나라가 잘못 한 것만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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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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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북한을 나오기 얼마 전인 2019년 4월에도 한국 드라마, 노래를 들었던 청년 2명이 공개 처형 당했는데 평성에서 있었다고 해요. 혜산은 그래도 조금 드물어요. 왜 그런가 하면, 중국의 문화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고, 사람들도 중국, 한국으로 워낙 많이 떠나다 보니 보안원들도 하루 자고 일어나면 ‘아! 저 집도 갔구나!’ 이렇게 생각할 정도이거든요. 하지만 평성은 평양의 안뜰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에요. 평성은 평양의 위성도시라 엄청 단속을 심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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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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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처벌은 존재했어요. 똑같을 정도죠. 한국 영화 보면 몇 년, 미국 영화 보면 몇 년,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 영화를 본 사람이 제일 높은 형을 받았어요. 예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 수위를 더 높인 것이죠. 예전에도 한국 영화 보면 무조건 교화를 갔어요. 그런데 미국 영화를 보면 교화를 무조건 가지는 않았어요. 구금되어 벌금을 물거나 그러기는 했고요. 단련대 보내고 그런 식으로 처벌 수위가 최근 나온 그 법에 명시된 것보다는 낮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이제는 당국이 급해진 것 같아요. 그냥 놔두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에요. 그때의 처벌 수위와 지금의 수위의 변화를 보면 엄청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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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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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다 봐요. 간부들도 다 보는데요. 시골 쪽에서도 봐요. 혜산처럼 모든 사람이 다 보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들도 건너 건너 접할 수 있다 보니까 시골에서는 못 본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시골에도 노트북이 있어서 USB를 통해 충분히 복사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혜산만 국경지역이 아니지 않나요? 다른 국경 지역을 통해서도 들어오니까요. 김정은을 위해서 다 바치는 그런 가족이 아니라면 거의 다 보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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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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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평남도 있을 때 (전파가) 많이 잡혔어요. '록음기'라고 보통 말해요. 록음기를 틀면 한국 라디오 방송 파장이 들어왔어요. 나라에서는 록음기를 고정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몰래몰래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들었죠. 당시 우리집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록음기가 있었어요. 카세트 테이프도 넣을 수 있는 거였는데 그게 전파가 엄청 잘 잡혔어요. 제 기억으로 1997~1998년도 까지도 한국 라디오 방송 전파가 잡혔어요. 강도 사건 관련 보도도 들은 적 있어요.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니, 저런 것도 방송에 나오나’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북한에서는 개인에 대한 내용은 일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KBS 방송이었는데 한국 사람이 말하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 독특해서 따라하던 것이 아직도 생각나요. 그런데 이제는 불가능해요. 2000년대 후반부터는 북한에서 한국의 전파를 막느라 많이 노력한 것으로 알아요. 그리고 요즘에는 전파가 잡히는지 길에서 검사를 많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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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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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여자 바지는 딱 주름 있는 것만 입을 수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청바지 같은 것은 아예 안 돼요. 레깅스도 안 되고요. 그냥 슬랙스 같은 바지인데 주름이 있어야 하고 딱 붙으면 안 돼요. 그리고 북한에서는 휴대전화 검열도 길 가다가 수시로 당할 수 있어요. 청년동맹 규찰대라고 있는데 거기서 단속하죠. 저도 학교 다닐 때 규찰대로 나간 적이 있어요. 저도 옷을 그렇게 입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이 옷을 그렇게 입으면 단속하고는 했어요. 만약 단속 받아서 걸렸다면 청년동맹 건물로 끌려 가요. 거기 가면 바지를 가위로 다시 기워 입지 못하게 무릎 쪽 생 천을 그냥 찢어 버려요. 만약 머리 염색으로 걸렸다면 머리카락도 막 잘라버리고요. 저도 염색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겨울에는 밖에 나갈 때 규찰대가 보이기라도 하면 패딩 모자를 계속 덮어쓰고 다녔어요. 저는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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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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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백성들 손에 못 들어가요. 안 들어가요. 그게 기껏 날아서 들어갔다고 쳐요. 그걸 백성들이 줍게 되면 그걸 주운 사람을 잡아가요. 봐도 안 집어요. 만약 그런 전단이 떨어지면 다 법기관에 알려요. 마지막 단계는 보위부 손으로 넘어가고요. 그건 한국에서 날아온 것인데 저 하나 때문에 우리 가족 3대가 다 잡혀 가길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에요. 제가 줍지 않으면 되는 건데 그 전단지 하나 본다고 해서 제 운명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사회가 뒤집어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거 전단지 날아간다고 해도 북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거나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극을 줘 보세요. 그러면 탈북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생기게 되고 우리가 거기에 남기고 온 우리 가족들에게 더 압력과 피해가 가게 되는 거죠. 거기 남겨진 가족들은 우리 때문에 조임을 당하고 감시 받으며 살아요. 그러면 우리 부모, 형제가 얼마나 속이 아프고 불안하겠어요? 이건 진짜 필요 없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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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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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판매하는 곳도 다 있어요. 영국과 러시아, 독일 이런 나라 책들인데 고전 문학 같은 것들이죠. ‘르콕 탐정’ 같은 책도 있어요. 개인이 책을 쓰거나 배포하는 건 안 돼요. 그런 건 북한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아요. 생각 자체를 못하죠. 당연히 개인이 만든 잡지 같은 것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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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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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에서는 크게 이슈화가 되고 사건에 대해 다 알게 되고 조사도 이뤄지고 그러겠지만 북한에서는 제가 한국으로 오기전까지 세 번이나 목격했지만 그 사건들에 대해서 동네에서 그냥 ‘누가 죽었대’라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오고 끝나고 그랬어요. 그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둥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곤 했죠. 그런 것을 보면, 죽은 사람이 불쌍하고 그랬어요. 따로 조사나 처벌이 있고 그런 게 없었어요. 한국은 조금만 수사를 해도 뉴스에 뜨고 난리가 나던데 북한에서는 살인 사건이라도 별로 알려지지도 않고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비리가 숨어 있으려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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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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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인 것을 검열해요. 사상, 예술적으로, 이 두 가지를 다 봐요. 원래 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술에서는 당연히 자유가 없어요. 예술에서 자유를 말할 때는, 북한에서는 자유를 ‘자본주의 사상 요소가 들어온다’고 표현해요. 그래서 자유가 없죠. 예술은 당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당 사상 선전 사업의 일환이에요. 검열하는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먼저 종목을 받아요. 거기서 승인 절차가 이뤄지죠. ‘이건 된다’, ‘이건 안 된다’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검열해보고 ‘이런 것은 이렇게 빼라’, ‘이거는 고쳐라’ 이런 식으로 해요. 그런데 그 다음에도 그렇게 하면 처벌이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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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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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인터넷이 아니고 국가 자체적으로 있는 그런 망이 연결된 것이 있긴 한데 굳이 많이 쓸 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휴대전화에 들어 있으니까 신문 다운받고 할 때나 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광명망'이 인터넷과 비슷하기는 해요. 그런데 그걸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도 않아요. 여기서 SNS 사용하듯이 사용하고 그렇지 않는 거죠. 그냥 나라에서 거기에 업로드 한 걸 우리는 볼 뿐이에요. 우리가 거기에 뭘 게재를 한다든가, 그걸 통해서 뭐 소셜 네트워킹을 한다든가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사람이 있어요. 대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죠. 수많은 인터넷 프로그래밍 교육도 그렇고 해커들도 많이 양성하고 있어요. 코딩 같은 교육도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고요. 그런 곳에서 한국의 인터넷에 접속하고 그런 것은 다 가능해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는데 교수들 같은 경우에는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어요. 교수들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SCI급 논문이나 그런 연구 자료를 접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인터넷을 하려면 교수라도 여러가지 절차를 밟아서 들어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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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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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휴대전화는 보통 전화나 통보문(문자), 그리고 ‘신문읽기’와 같은 기본적인 앱만 사용할 수 있게 나와요. ‘통신센터’라는 곳이 있어요. 전화기를 수리하거나 파는 곳이죠. 여기서 휴대전화 앱을 검사하고 불필요한 것을 모두 삭제한 상태로 만들어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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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삼지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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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가 있다 보니 보위부에서 우리 가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브로커를 이용해 저에게 전화를 종종했었죠. 한 번은 보위부에서 운용하는 도청기계가 엄마와 제가 통화하는 내용을 그대로 잡았어요. 정확한 작동 방식은 모르나 근방의 모든 파장을 다 잡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 이후부터 보위부에서 계속 우리집을 찾아와 저를 데려가 조사하고 내보내기를 반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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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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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지역까지 가야해요.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한국과 전화하려고 국경으로 가서 전화했죠. 그때 한국에 있는 가족과 통화하기 위해 브로커의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했어요. 최근에는 국경 쪽에 접근하기 힘들기도 하고, 내륙 지역 사람이 길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국경으로 전화하기 위해 나가기도 힘들어 해요. 잘못 걸리면 잡혀가요. 그렇다고 해서 혜산 사람이 내륙으로 들어와 통화하려는 사람을 데리고 국경 쪽으로 가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각 지역에서 그 지역 출신 중 중간중간 연결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돈을 받고 서로 연결해 줘요. 그렇게 통화를 원하는 사람을 접촉하면 북한 휴대전화로 녹음을 해요. 그것을 가지고 국경 지역에서 삼성 등 한국 휴대전화를 가지고 한국 가족에게 전달해주죠. 물론, 혹시 사기치는 브로커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족끼리만 알 수 있는 내용을 녹음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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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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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돈을 받아 전달하는 사람들, 한국과 전화를 연결해주는 브로커 등 이번에 대규모 검거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 40~60명을 몽땅 잡아서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고 들었어요. 정확히 2021년 4월과 5월 사이에 량강도에 검거가 이뤄지면서 이런 일이 있었죠. 브로커들이 다 잡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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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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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북한에도 집회, 시위가 있어요. 모든 집회와 시위는 국가의 조직적인 지시 아래 반미, 반남조선을 외치는 내용이죠. 이런 시위를 할 때는 해당 지역의 군대, 경찰, 보위부, 일반 시민, 직장인 등이 야외 운동장 같은 곳에 모두 모여야 해요. 모든 도로를 다 차단하고 몇 만 명이 시위를 해요. 이런 식의 시위가 아닌, 반정부 시위는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 해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머리칼이 쭈뼛이 설 정도로 무서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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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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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못 해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했다가는 자기뿐 아니라 온 가족을 멸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 대항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해요. 억울하면 분신자살이라도 하면서 제 억울함을 호소할 배짱은 있지만 저로 인해 제 일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져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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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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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여럿이 모여 사적인 목적의 모임을 가지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해요. 이와 같은 사적인 모임을 정권을 뒤집자는 의미를 가진 하나의 반국가행위로 보고 처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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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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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대의원선거를 하고 왔어요. 북한에서는 선거할 때 투표 카드가 있어요. 거기에 우리가 투표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죠. 그냥 그 한 사람의 이름이 있어요. 북한은 투표 용지에 한 명의 이름만 있거든요. 한국에서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자기가 마음 가는 사람을 찍는 것으로 들었어요. 하지만 북한은 아니에요. 지역에서 한 명이 대의원 선거에 나오고 그 사람 사진이 붙는데 그 사람에게만 무조건 투표를 해야 해요. 투표 용지를 받아서 그냥 투표함에 그대로 넣는 것이 끝이죠. 물론 반대하는 사람은 용지에 X표를 해라고 말하기는 해요.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아요. 그렇게 하면 잡혀 가니까요. 투표함이 있는 곳에는 본인만 투표할 수 있도록 밖에서 보이지 않게 가림막을 다 쳐 놓기는 했어요. 선택권도 없이 투표하는 것이라 그냥 X표를 할 것도 없이 투표 용지를 함에 넣고 오기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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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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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노동당(조선로동당) 하나만 계속 강조하고 노동당에 대해서만 가르쳐요. 저는 실제 다른 당이 있다는 걸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한국에서는 선거 때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출마할 수 있고 자기 능력을 뽐낼 수 있지 않나요? 하지만 북한은 그런 게 없어요. 이 사람이 나오면 무조건 찬성해야 하고 무조건 찍어야 하죠. 그리고 출마한다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누가 나오는 지 정해진 것 같아요. 나라에서 정하는 대로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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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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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0.1%나 될런가 모르겠네요. 여기 한국으로 말하면 기독교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주시고…’ 이런 세뇌 교육을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받아요. 그래서 그게 몸에 배었어요. 제가 한국 와서 기독교를 믿으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북한의 세뇌 교육이 기독교와 비슷하더라고요. 기독교와 북한의 김씨 가문의 혁명활동이나 한일무장투쟁에 대해 교육받은 것을 비교해 보니 이 모든 교육 체계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북한에서도 어릴 때부터 그런 내용을 계속 들으니 몸에 배게 된 것이죠. 그러다 보니 김씨 가문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아니라고 해도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TV를 보면 김정은이 손짓 한 번 하면 막 환호성을 지르고 하지 않나요? 그게 여기 기독교에서 하는 것과 같아요. 딱 그런 것이더라고요. 그렇다보니 북한 사람들이 아직 생각이 안 바뀌는 것이에요. 이 사람들에게 북한 밖의 생활과 문화를 볼 수 있게끔 창문을 열어야 하는데 지금 북한은 그 창문을 딱 닫아 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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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남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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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자연과학, 사회주의도덕, 미술, 체육, 기초기술, 음악, 역사, 조선지리, 그리고 한두 개 더 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아, 제일 중요한 걸 기억 못했네요. ‘김일성대원수님 어린시절’, ‘김정일대원수님 어린시절’, ‘김정숙어머님 혁명활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원수님 어린시절’ 같은 게 있어요. 이런 과목도 일반 교과시간에 일반 과목처럼 한 주에 몇 시간씩 배워요. 진도가 있는 과목이죠. 이건 대학가서도 배워요. 이것도 다 기본과목에 속하는 것이에요. 이거는 소학교(초등학교)에서도 배울 뿐만 아니라 유치원(5~6세)과 탁아소(1개월~4살)때부터 배워요. 같은 내용은 아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용이 더 심화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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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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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 생활총화를 해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강연회를 하고요. 또 일주일에 한 번씩 학습을 해요. 일주일에 기본 세 번 이상 사상 교육을 받는 것이죠. 이런 것은 사상 교육이니 초급당 비서가 진행해요. 생활총화는 회사마다 다른데, 큰 단위에는 초급당이 있고 그 밑에 부문당, 그리고 그 밑에 당세포라는 가장 말단 조직이 있어요. 한 개 작업반이 한 개 세포이죠. 한 개 세포에는 열댓 명씩 있어요. 북한에서는 생활총화를 당원들은 당원끼리, 직맹 원들은 직맹원끼리, 그리고 청년동맹원들은 청년동맹원끼리 따로 해요. 강연은 연사가 위에서 내려온 강연자료를 그대로 읽어주고 자기 의견을 조금 보태는 식이에요. 학습은 시기별로 달라요.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새해 신년사를 발표하는데 그 신년사에 대해 한 글자 한 글자 풀이하는 식이죠. 매주 학습하는 요일이 고정되어 있어요. 제가 다녔던 공장의 경우 매주 월요일이 학습하는 날이었어요. 보통 2시간 정도 이뤄져요. 공장 노동자 전체가 다 모여서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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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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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도 불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에 대해 말할 경우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 않죠. 사실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에게 불만이 많아요. 정치적인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경우 삼대가 멸족될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을 뿐이에요. 아버지가 한 말에 대해서 아들도 책임을 져야 하고 친척이 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처벌을 받아야 하는 곳이 북한이에요. 김정은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일상생활에선 볼 수 없다고 봐야 해요. 가족끼리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워요. 어릴 때부터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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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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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는 사람들은 솔직히 김정은 시대 들어서면서 너무 많이 조이고, 생활이 암담해지면서 앞이 안보이니까 자유를 찾아서 온다고 해야 하나요? 이제 우리는 자식들 때문에 생각이 바뀌어서 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애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오는 것이죠. 북한에서는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나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그런 곳이니까요. 우리 대에는 그렇게 산다고 해도, 자식들이 그렇게 산다고 하면 너무 암담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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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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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간 적이 있어요. 사실 중국으로 팔려 갔죠. 그렇게 중국에서 살다가 도망쳐서 하얼빈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식당일을 하다가 검문에 걸려서 북송되었어요. 채 4년이 안 되게 중국에 산 것이죠. 북송되고 난 후 결국 회령 전거리 교화소에 수감되어 3년을 살고 나왔어요. 형을 살고 나왔지만, 중국에 한 번 갔다 온 전력이 있어서 감시가 붙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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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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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국경 지역을 다 봉쇄했어요. 중국 사람들과 거래하는 게 다 없어졌죠. 혜산에서 중국을 통해 밀수하면 이 밀수품이 다른 도까지 퍼져 나가요. 그런데 밀수가 막히면 타 도에서 물건을 사 가던 사람, 날라주던 사람, 팔던 사람 전부 다 일이 없어지게 되는 거죠. 시장이 딱 멈추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팔 물건을 중국을 통해 구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 장마당에 나가 내놔도 사 가는 사람도 없어요. 지금(2020년 중순) 장마당에는 물건도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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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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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지역 가는 거 보이면 쏴 죽여라고 했다더라고요. 그런데 아직 저는 국경 지역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은 듣지 못했어요. 그러나 나라에서 걸어가는 게 있으면 무조건 쏘라고 방침을 내렸다는 것은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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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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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밀수라고 하면서 보위부 사람들이 대놓고 밤에 직접 해요. 지금 같은 코로나19 시기에도 하고 있을 것이에요. 차를 이용해서 중국에서 요구하는 걸 주고 대신 쌀을 받거나 하죠. 2010년대 중반부터 있었어요. 공개적으로, 대낮에도 하기도 했고요. 중국에서 주로 쌀을 받는데 일반 사람들은 하지도 못할 엄청난 규모예요. 강을 통해 쌀을 몇 톤 씩 날라 받아요. 보위부 자기네가 먹고 살려고 하는 거죠. 당에서 방침이 내려온 거라고 하기 보다는 보위부 자체적으로, 아니면 무역회사에서 하는 것이에요. 무역회사도 실상 돈 있는 사람과 보위부가 결탁해서 하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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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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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통제를 한다고 해도 법기관을 끼고 하면 어찌저찌 다 했어요. 그런데 2020년도에 코로나19 때문에 아예 전면적으로 못하게 한다고 해요. 작년(2020년) 9월에 딴 잣을 아직까지도 중국에 수출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딴 잣을 지금 다 가지고만 있고 팔지 못 한다고 해요. 아예 밀수 자체가 안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시 노예시대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그런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들었어요. 북한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했더니 벌이가 없어 죽 먹으면서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해요. 코로나19 이후로는 제가 살던 김정숙군 쪽은 개인 밀수가 없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혜산 쪽은 아직 조금씩 개인 밀수를 하고 있다고는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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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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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나타나면서 북한에서 취한 1차 조치가 무엇인가 하면 일체 통행증을 떼어 주지 않은 것이에요. 북한에서는 여행증명서가 있어야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증명서 자체를 완전히 떼어 주지 않았죠. 국가적으로 국방위원회라든가, 당 전원위원회라든가 이번에 8차대회라든지 세포비서대회라든지 이런 국가적으로 움직이는 중요한 회의를 제외하고는 일체 출장을 금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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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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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기차는 전기로 움직여요. 북한에는 기름이 없어요. 정전이 되었다 하면 기차는 사흘이든, 나흘이든 관계없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어요. 그러다가 전기가 오면 다시 움직이고 그러죠. 지금은 더 할 것이에요. 돈 있는 사람은 기차를 안 탔어요. 정전이 되면 그게 얼마나 오래 가든 기차 안에 계속 있어야 해요. 잠도 앉은 자리에서 자야 하고요. 혜산에서 평성까지는 몇 시간이 아니에요. 며칠씩 걸려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가면 힘들어요. 그래도 타는 사람은 있어요. 가격이 싸니까요. 전기가 없기는 하지만 기차는 운영되고 있어요. 장사꾼들은 많이 안 타고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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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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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의 물건은 주로 기차편을 통해 들어오며 차편으로도 많이 들어와요. 북한에는 한국처럼 택배 시스템이 없어요. 대신 한국의 시외버스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이용할 수 있는 화물택배와 비슷한 것이 있어요. 출발지 기차역에서 화물을 붙이면 화물칸에 실려 도착지까지 간 뒤 그곳에서 대기하던 사람이 화물을 수령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이 직접 물건을 가져오기보다는 기차나 차를 이용해서 화물을 주고받아요. 요즘에는 북한에서도 통신이 많이 발달했어요. 집전화나 손전화를 이용해서 거래를 해요. 거래가 성사되면 물건을 보내거나 받는 거죠. 요즘에는 사람이 직접 가서 일일이 거래하기보다 전화를 이용해서 거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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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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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증명서가 필요한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어요. 같은 지방, 예를 들어 량강도 안에서 어디 가는 거면 필요 없는데, 국경 같은 곳은 증명서가 필요해요. 국경에 갈 수 있는 증명서는 또 따로 있어요. 연선지대는 무조건 증명서가 있어야 갈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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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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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있어요. 그런 것을 이용하면 돼요. 자동차가 서 있는 승차장 같은 곳이 있어요. 개인이 운영하는 차라고 보면 되죠. 택시와 똑같아요. 단지 개인이 돈을 버는 것이에요. 개인이라고는 하지만 자동차는 국가 소유물이나 같아요. 국가에 하루 수익의 절반이나 얼마를 바치는 식이에요. ‘서비스차’라고 해요. 제가 멀리 가야 하거나 짐을 실어야 한다고 하면 타는 거죠. 사람만 타는 차도 있고 짐을 실을 수 있는 큰 차도 있어요. 이런 것도 전화로 부르고 그렇지는 않아요. 특정 장소에 가서 타고 그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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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남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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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사람도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당연히 평양에 거주할 수 있어요. 하지만 평양 시민이 되진 못 해요. 대학을 마치면 다시 돌아가야 하죠. 지방 사람들도 평양을 들락날락 할 수 있어요. 돈만 있으면 가요. 허가증이 있어야 하긴 하지만 돈(뇌물)만 있으면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평양에 가는 게 아예 금지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북한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에요. 옛날부터 다 가능했어요. 돈만 있으면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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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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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리긴 하나 다른 지역으로도 이사가 가능해요. 담당자에게 뇌물만 주면 가능하죠. 보통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지역에 살고 싶어서 옮긴다기 보다 직업이나 생계 등 다른 이유로 인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라선이나 평양 같은 경우에는 다른 지역 사람이 들어오기 특히 힘들어요. 그러나 여전히 이사가 가능해요. 라선의 경우 한 가족 기준으로 뇌물로 1,000달러 정도는 줘야 해요. 1,000달러면 북한에서 쉽게 모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 라선으로 이사 온 사람들을 봤어요. 이들은 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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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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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은 관리소로 보내지는 것에 비해선 낮은 처벌이에요. 중국과 연결되면서 너무 많이 밀수 같은 것을 해 먹었을 때 받을 수 있는 게 추방이죠. 추방은 온 가족이 통째로 농촌 같은 구석에 보내지는 것이에요. 완전 무인지경 같은 곳에 추방된 사람만 따로 모여 살게 해요. 그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복귀할 수도 있어요. 돈이 있거나 가족들 중에 힘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자기가 가겠다는 마을에 집을 사서 다시 나온 경우도 있었어요. 저는 그런 집을 한 집 봤어요. 보안원들도 다 눕힐 힘이 있어야 하죠. 그렇지 못하면 평생 거기서 살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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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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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 구류장에서 28일간 구금되어 조사받았어요. 구타나 고문은 다 있어요. 다 그렇게 하죠. 보위부는 사람을 잡아 들일 때 정확한 근거를 확보하고 잡아요. 제가 구금되었을 때 제 앞 전에 잡혔던 저와 같이 일했던 사람이 자기 진술서를 쓰면서 저에 대한 내용도 다 썼어요. 저는 그 진술서를 보고 100% 다 인정했어요. 그래서 저는 한 번도 맞지 않았죠. 왜냐고요? 제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증인이 한 진술 내용이 제가 한 활동과 모두 똑같다고 인정을 했기 때문이에요. 보위부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다 알고 잡아들이는 상황인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속이면서 뻗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럴 때는 보위부에서 엄청 때려요. 제가 보위부에서 조사받을 때도 같이 있던 사람들 중에서 맞았던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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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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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소는 정치범들이 들어가는 곳이에요. 제 친척이 ■■호 관리소 죄수로 들어갔던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거기 관리소가 없어졌고요. 2000년도에 해산된 것으로 알아요. 그러니까 그게 해산되면서 해제민이라고 하는데 친척 시누이, 시어머니가 다 죄수들이다 보니까, 그렇게 살다가 해제된 사람들이다 보니까 많이 들었어요. 제 친척은 예전 관리소 자리에 살고 있어요. 그때 저도 거기 같이 가서 돌아본 적 있어요. 관리소 초소로부터 한 35리 들어가면서 마을이 시작되는데 집이라는 것은 제 키가 160cm 정도인데 저에게도 작을 정도로 낮았어요. 거기 집에 들어가 보니까 밥솥을 타고 넘어 가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더라고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평생 머리를 숙이고 살아라’는 것이었어요. 집 사이 간격이 1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서로 감시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남편하고 아내는, 남편은 낮에 일을 시키고 아내는 밤에 일을 시켜서 둘이 잠자리를 가지지 못하게 해요. 둘이 부부생활을 절대 못하게 하는 것이에요. 거기서 일을 잘하면 표창으로 하룻밤 자게 한다더라고요. 그 골이 엄청 깊고 넓어요. 골짜기가 좁고 긴 게 아니라, 길면서 넓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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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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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혜산시 보안서로 보내졌을 때 구류장에는 200명 정도가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구류장은 조사하는 기간에 구금되는 장소를 말해요. 구류장에 딱 들어가면 각 사람당 한 50cm 간격으로 앉혀요. 거기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요. 숨도 크게 못 쉬고, 재채기도 못 하고, 눈을 다른 곳에 쳐다보지도 못 하죠. 한 칸당 예닐곱에서 열 명, 인원이 많을 때는 스무 명까지 있기도 해요. 거기서 구금되어 있으면서 조사받은 후 단련대로 보내지든지 교양소로 보내지든지 교화소로 보내든지 거기서 갈라 보내요. 구류장에 구금되어서 예심을 받으면 재판을 받고 형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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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경원군
- 여
- 1970년대 출생
- 199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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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온성 집결소에 있을 때 중국으로 나가서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가려다 잡힌 애들이 7명 있었어요. 걔네들은 교화 7년씩 다 먹었더군요. 그런데 남자애를 보니까 머리가 다 섰더군요. 영양이 부족하니까 머리가 서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 그런 것을 알았어요. 머리카락이 위로 섰다는 말이에요. 못 먹고 영양 부족이면 머리가 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거기서는 죽 같은 것을 줬어요. 식기 같은 곳에다가 통강냉이 주니까… 그거도 사람들이 먹어요. 쉰 게 나와도 먹어요. 그거만 먹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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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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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단련대라고 있는데 이것은 경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조금 단련만 주면 고칠수 있겠다는 사람들이 보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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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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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소는 공민증이 박탈되지 않고 형기를 1년에서 2년까지 사는 곳이에요. 노동 강도는 교양소가 로동교화소보다 더 세요. 엄청 세죠. 여기는 명칭 자체가 로동교양소이지 않나요? 일을 시켜서 그 사람의 죄를 반성하게 하고 교양하게 하는 곳이죠. 그래도 여기서는 단체, 조직 생활을 하면서 노래도 부를 수 있고, 거울도 볼 수 있고, 머리도 빗을 수 있고 그래요. 어느정도 자유가 있다는 말이죠. 자유가 있다고는 해도 그게 여기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는 아니에요. 단체적으로 오락시간 같은 걸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요. 그리고 보니까 교양소 사람들은 밖으로 일하러 나갈 때도 노래를 부르고 다니곤 하더라고요. 저는 교화소에 있을 때 취장(취사장)에 있다 보니까 밖으로 나갈 일이 더러 있었어요. 그때 보곤 했어요. 교양소는 교화소 옆에 딸려 있어요. 건물이 붙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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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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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죄를 지은 사람은 단련대로 가고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은 교화소로 가요. 정치적인 개념을 띄는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정치범수용소로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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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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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실에서 가죽 혁대로 막 때려요. 보위지도원이 차고 있는 허리띠로 막 때리는 거죠. 때릴 때도, 휘두르기도 하지만 가죽 혁대를 주먹에 말아서 때리기도 해요. 주먹에 가죽 혁대를 동그랗게 감는데, 가죽 부위가 주먹 앞으로 오게 하는 게 아니라, 혁대의 고리 쇠 부분을 주먹 앞으로 오게 해서 그 부분으로 사람을 막 때려요. 여자 죄수에게는 대체로 그렇게 때려요. 남자 죄수에게는 주먹으로 사정없이 구타하죠. 또, 남자 죄수에게는 보위지도원이 철창 안에서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게 하거나 철창을 잡으라고 한 다음 총기 수입을 하는 쇠 꼬질대로 손등 부분을 아주 세게 내려치기도 해요. 때리다가 철창에서 손을 떼기라도 하면 철창 뒷문으로 보위지도원이 들어와서 아주 죽여 놔요. 맞을 때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 해요. 그저 죽은 인생처럼 맞아야 하죠. 몸에 멍이 쫙쫙 가고 많이 다쳐요. 때릴 땐 살피고 때리는 게 없어요. 그저 짐승 잡듯이 때려요. 범죄자는 범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죽도록 때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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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삼지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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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보위부에 조사받으러 가면 욕설은 기본이고 구타와 고문도 당해요. 한국 사람들이 보기엔 설마 그럴까 생각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죠. 주변에 보위부에 불려 갔다가 구타와 고문으로 인해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운이 좋게도 구타나 고문을 당하진 않았어요. 물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저급한 수준의 욕설은 당연히 매번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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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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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서 조사는 보통 보위부 소좌, 중좌가 했어요. 이 사람들이 취급자들이죠. 제가 제 주장을 계속 내세우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하는 등 그 사람들이 의도하는 대로 진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조사실로 따로 불러요. 조사실에 들어가면 나무 의자가 있어요. 들어갈 때는 족쇄에 찬 상태로 들어가죠. 의자에 앉으면 족쇄를 풀어줘요. 그런데 나무 의자에 앉으면 허벅지 위로 의자에 달린 커다란 나무판이 올라가고, 그 나무판과 의자를 족쇄로 채워버려요. 그 상태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 해요. 제 앞에는 책상이 있고 조사관이 조사해요.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야 해요. 의자 커다란 것에 몸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손, 발, 빗자루 등 눈에 보이는 대로 잡고 때려요. 조사받고 난 후 피 터져 내려오는 애들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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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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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같이 보위부 구류장에 같이 있던 애가 하루는 아침 일직 조사를 받으러 나갔어요. 그런데 보위부는 열흘이든 이십 일이든 세수를 일체 안 시켜요. 보위부 안에서는 못 씻게 해요. 그러니까 완전 무슨 짐승 이하인 것이죠. 개, 돼지 취급을 받아요. 그런데 얘가 아침에 구류장 감방 안 구석에 대충 무릎 높이 칸막이가 있는 화장실에서 변을 보았는데 거기서 변을 본 후 변기에다가 붓는 물이 통에 담겨 있는데 그 물을 변기에 부으면서 자기 얼굴도 조금 닦았더라고요. 그리고 취급(조사)을 불러서 일찍 나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나갔다가 나중에 울면서 들어오는데 한 쪽 무릎이 주먹만큼 부어 있더라고요. 구류장 안에서는 걔처럼 어디가 터지고 부어도 그거에 대해 물어보거나 말하지 못하니까 눈과 입은 안 돌리고 조용히 어찌하다가 그렇게 됐냐고 물어보니까 세수했다고 그렇게 때렸다고 하더군요. 보위지도원이 구둣발로 찼다고요. 세수를 못 하게 되어있는데 왜 세수했냐고 하면서 구둣발로 무릎을 차서 새파랗게 감자같이 무릎이 부어서 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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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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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소에서는 노동을 아침 7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해요. 그래도 수감자들은 밤을 자지 않고 일해야 해요. 자기 과제를 끝내지 못하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까 과제를 다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밤새 해야 하는 거죠. 저도 교화소를 나오기 전에 한 40일 동안 취장에서 그런 것을 만드는 반으로 쫓겨 나가서 일한 적이 있어요. 손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도 시간 내에 자기 과제를 못하더라고요. 배접 같은 경우는 하루에 3천 개를 해야 했어요. 그런데 저는 1천 개 정도 하니까 시간이 다 되더라고요. 그래서 밤에 자는 사람들이 없어요. 제 시간에 과제를 한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다 하지 못 한 사람은 밤에 몰래 일어나서 다 하곤 했어요. 그걸 다 하지 못하면 밥을 적게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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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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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5년 시 안전부 구류장에 있을 때 같이 있던 애들이 말한 것을 들은 적 있는데 걔네들도 공개 처형이라는 것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공개 처형 대신, 도 보안국에 올려 보내서 구류장 안에 3개월을 앉혀 놓고 소리 없이 불러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난 다음 쇠몽둥이로 보안원이 까서 죽인다고 했어요. 때려 죽이기 위해 불러낼 때는, 그냥 취급하는 것처럼 불러내요. 감방에는 앞에 쇠창살이 있고 뒤로는 철로 된 뒷문이 있고 커다란 자물쇠를 걸어 놔요. 그게 탁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몇 호 나와라!” 말하죠. 그렇게 사람이 나가고, 그 이후로 사람이 다시 들어오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아, 어제 밤에 몇 호 감방에서 어떻게 했구나!’ 생각하고 수감자들끼리 알고 그래요. 밤에 그렇게 불러내는 것은 죽이는 것이라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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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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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규정에는 한 끼당 400g씩 줘야 해요. 하지만 쌀이 항상 모자라다 보니 옥수수 껍질도 벗기지 않은 것을 씻지도 않은 쌀과 섞어서 밥을 지어 주곤 했어요. 실제 교화소 수감된 사람들이 먹는 밥을 질게 안하고 하면 다 합쳐도 한 끼에 200g도 안 될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 수감자들은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어요. 일반 사람 같으면 한 두 입 정도면 다 먹을 양 밖에 되지 않았죠. 반찬이라는 것은 염장 배추예요. 염장 배추를 국 끓여서 줘요. 규정에는 반찬도 200g을 주게 되어 있으나 실제 주는 것은 100g도 안 되는 양이에요. 하루 세 끼가 그렇게 나오는데 과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거기서 양을 더 줄여요. 거기서 절반을 줄여서 주고 그러는 것이죠. 그래서 허약 걸려 죽는 사람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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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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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부 분주소 구류장에 잡혀 가서 감옥살이도 하고 그랬어요. 안전원이 "야 이 개쌍년아!, 어디서 이런 악독한 간나가!" 이러면서 밀대로 절 세게 때리더라고요. 그리고 의자를 들어서 모서리로 제 머리를 쳤어요. 아직도 제 눈 위쪽에는 그때 다친 상처가 있어요. 그때 눈 위가 째지면서 피가 쫙 쏟아지더라고요. 옷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저는 어쨌든 죄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죠. 피가 계속 쏟아져도 별다른 조치는 없었어요. 안전원이 종이 뭉치를 주면서 "닦아라!"고 소리칠 뿐이었어요. 치료요? 말도 하지 마세요. 치료가 어디 있어요? 제가 피를 너무 쏟으니까 어지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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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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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변호사는 우리 편이 아니에요. 북한에도 변호사가 있어요. 형식적으로 있죠. 하지만 변호사는 판사와 검사와 같은 편이지 우리 편이 아니에요. 제가 보위부 구류장에 있을 때도 같은 호실에 있던 애가 드라마처럼 생각해서 ‘변호사는 우리 편이지 않나?’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걔가 재판에 나갔는데 변호사가 검사와 같이 자기에게 막말을 하면서 지적하고 해서 깜짝 놀라 다시 구류장으로 들어와서 취급자에게 "아니, 변호사는 우리 편이 아닌가?" 하고 막 욕하고 그랬어요. 그 사람은 그런 곳에 처음 들어와 봤다 보니 잘 몰라서 그런 거였죠. 그래서 저도 당시에 막 웃으며 그 사람에게 “야, 우리는 범죄자인데 어떻게 변호사가 우리 편을 들겠나?”라고 말했어요. 변호사는 절대로 우리 편을 들지 않아요. 변호사는 개인이 부를 수도 없어요. 구류장에 있을 때 변호사가 온다고 해서 오기는 하는데,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그저 대충 듣고 갈 뿐이죠. 보위부에는 일단 들어가면 가족하고 떨어져요. 면회가 일체 금지되죠. 보통 그래도 보안서 같은 경우는 안에서 계호원을 통하든 뇌물을 줘서 비밀이 밖으로 새기도 해요. 그런데 보위부는 그저 안에서 죽여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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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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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 들어가면, 집결소든 구금소든 다 같아요. 아침 8시부터는 이중 삼중으로 된 철창 안 감옥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허리를 펴고 양 무릎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밤 10시까지 앉아 있어야 해요. 눈을 감거나, 졸거나,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눈알을 돌리거나 그러면 계호원들이 때려요. 때릴 때는 철창 앞으로 나오라고 한 후 철창 앞에 세워놓고 때려요. 자기네들은 철창 안으로 안 들어와요. 팔뚝 굵기만 한 각목으로 때려요. 사람이 앉아서 각 잡고 한두 시간 있으면 허리가 쑤실 수밖에 없어요. 다리도 저리죠. 다리, 허리가 아파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다리를 바꾸면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또 때려요. 말 같지 않냐고 하면서 죽도록 때리는 거죠. 이런 생활을 1년 동안 단 하루도 안 빠지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생일, 추석, 설날, 명절… 그런 거 상관없이 일 년 열 두 달 앉아서 계속 있어야 했어요. 이 고통이란 게, 사람이 상상하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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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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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부모, 처자가 돼지나 짐승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못 보고 강제노역과 같은 그런 생활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만약 당신이 자식을 키운다면, 애들을 유치원 보낼 때 남들보다 옷도 잘 입히고 사회에서 빛이 나게 키우자고 품도 들이고 공도 들여서 공부시키고 개인교사 붙이고 그러고 싶지 않겠어요? 그런데 자기 자식이 사회와 아예 완전히 격리된 채로 산골에서 남루한 옷을 걸치고 배고픈데 먹지도 못하고 계속 일해야 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고 하면, 그런 가슴 아픔과 공포는 얼마나 크겠어요? 자신이 죽어야 그 공포와 가슴 아픔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사형에 대한 공포와 관리소에 대한 공포는 차원이 달라요. 오히려 사형에 대한 공포는 제 자신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고 일정 시기를 지나면 마음을 비울 수도 있는 공포인데, 관리소에 대한 공포는 죽을 때까지 이런 공포와 가슴 아픔을 주기에 관리소 들어간다는 것이 더 큰 공포라고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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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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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 들어가면 그저 무한정 두들겨 패요. 보위부 사람들은 스스로 "우리에게는 인권 유린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다녀요. 우리 집사람이 보위부에 구금된 적이 있어요. 아내 말로는 들어가자마자 무한정 두들겨 팼다고 해요. 보위원이 질문했을 때 대답하지 않으면 그다음부터는 계속 구타가 이뤄졌어요.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용의자가 조사실 의자에 앉으면 무릎 위에 철판을 올려놓고 의자와 고정해요. 의자는 땅에 고정되어 있어요.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상태에서 두들겨 패 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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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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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보위부에 구금되면 맞았다고 들었어요. 각목으로도 때리고 고문하고 해서 다리도 못쓰고 그런 사람도 많았죠. 2017년, 저랑 같이 구금된 한 사람은 예전에도 보위부에 구금된 적이 있었어요. 그 여자가 말하길 2015, 2016년 전에는 세게 맞았는데 지금(2017년)은 안 때린다고 했어요. 제가 보위부에 구금되어 있을 때 보위원이 “너희들은 다 역적이라 죽여야 하는데 하도 당에서 용서해주라고 해서 살려준다.”라며 “밖에서 인권이라고 떠들어대니까 너희들을 안 때린다.”라고 말하더군요. 최근에는 인권 문제라는 말이 나오고부터 보위부 안에서 피구금자들을 안 때린다고 해요. 옛날에는 한국행을 기도하면 무조건 관리소(정치범수용소)로 보내곤 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아요. 아마 김정은도 뭔가 찜찜한 게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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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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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공개 처형을 한 번 보기는 했어요. 그때가 제가 중학교, 그때쯤이었어요. 원산에 동명산이라는 산이 있어요. 신풍시장, 원산경기장 위에 길이 쭉 있는데 그 산 밑에다가 사형수를 세워놓고 양 팔을 벌리게 해서 나무로 된 말뚝에 묶고 눈을 싸매고 다리까지 묶어요. 사수 3명이 나와서 각 3발씩 쐈던 것 같아요. 자동보총으로 사람을 쏘니까 살점이 뜯어져 나가고 팔이 부서지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멀미가 오더군요. 처음 그런 것을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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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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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에 처해진 여자는 임신한 사람이었어요. 이 여자는 이미 결혼해서 자식이 있는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그 사람의 딸을 죽였어요. 그래서 살인죄로 그 여자가 교수형을 당했어요. 임신된 상태라 배가 다 나온 상태였는데 교수형에 처하더라고요. 그래서 뱃속의 아기도 같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한 번에 두 명이 교수형으로 죽은 거죠. 교수형장에 밧줄이 길다랗게 있었어요. 말뚝 높이가 한 10~15m정도 되던가요? 거기 뭐를 설치했던데 발로 누르니까 밧줄이 주르륵 소리를 내면서 내려왔고 그 여자 목에 밧줄을 걸더군요. 그리고는 밧줄이 올라가던데 목에 밧줄이 걸린 채로 그 여자도 끌려 올라가더라고요. 한 2m 정도 올라가니까 벌써 그 여자가 퍼덕퍼덕 거리더라고요. 다리를 막 흔들고... 그 다음부터는, 한 3m 올라가니까 더 이상 펄떡거리는 거도 없더라고요. 그저 공손히 있었어요. 그때 아마 숨이 넘어갔을 거예요. 축 늘어지고 나서는 10m까지 올라갔어요. 애들도 뭐고 그걸 다 봤어요. 그걸 보고 충격 받는 사람 많았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 나라에서는 신경쓰지도 않아요. 오히려 니네들은 이렇게 살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요. 이런 식으로 교양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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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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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들어봤는데 최근에는 공개 처형에 대해 들어본 적 없어요. 다 구류장 안에서 처리해요. 재판에서 사형 형기를 먹은 사람은 구류장에서 처형한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처형하는 것은 최근에도 계속 있어요. 보위부 구류장에서 저와 같은 호실에 있던 한 여자는 살인해서 들어왔었어요. 이 사람은 재판에서 사형을 받았죠. 같이 있다가 사형 날짜가 되는 날 나가더니 다시 안 들어오더라고요. 또, 제가 보안서 안에 있을 때 계호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깐다’고 하더군요. 때려서 죽이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사형할 때 때려 죽인다는 말이죠. 전문적으로 까는 계호원들이 있어요. 걔네들에게 술을 먹인 다음 사형 대상자를 때려 죽이게 하죠. 맑은 정신으로는 못 하니까요. 그렇게 죽인 사람은 끌고가서 그냥 땅에 묻고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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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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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동사무소에 근무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지 않겠어요? 그때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보위부에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 죽인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어요. 보위부 안에서 예심원이 죄수를 죽여야겠다고 하면, 그 죄수 앞에서 말을 막 시키는데 다른 사람이 뒤에 와서 죄수 대가리를 까서 죽인다고 하더라고요. 민간인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지만 그게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요즘은 때려 죽인다고 하더라고요. 예전 실시하던 공개 처형이 없어진 대신 그렇게 때려 죽인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이 동네에서 돌았어요. 여러 사람들이 그런 말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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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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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3년 동안 있으면서 허약 걸려 죽는 사람은 여자 교화소에서는 많이 보지는 않았고 한 10명 정도가 죽었어요. 그런데 남자 교화소에서 남자들이 죽는 것은 많이 봤어요. 남자들이 시체를 많이 내어 가더라고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남자 교화소가 보이는 쪽으로 나갈 때가 있는데 나갈 때마다 그 시체를 화장터로 내가는 것을 봤어요. 화장터로 나가는 문은 정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정문은 하나라서 남자든 여자든 그곳을 통해 지나가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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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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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김정은이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했어요. 저는 그 소식을 듣고 그래도 자기의 고모부를 처형한다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방송을 통해서 장성택이 도박, 마약, 불륜 등의 행위를 저질러 처형되었다는 내용이 발표되었죠. 같이 일하던 직원들과 휴식시간에 대화하면서 상황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장성택을 지칭할 때 항상 ‘동지’라는 호칭을 함께 붙였으나 처형되고 난 다음날부터는 그냥 모두들 장성택을 언급할 때 이름만 부르거나 ‘반당’이니 ‘반혁명’이니 하는 단어와 함께 말했어요.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고모부를 죽인 김정은에게 많이 실망했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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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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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 보안서에서 죽는 사람들은 시체를 주지 않아요. 제가 잘 아는 동생의 아버지가 인신매매를 하다가 잡혀서 처형당했어요. 그때 그 아버지를 공개 처형 했었죠. 가족들은 아버지가 교화소 몇 년을 받을 걸로 생각했다고 해요. 처형이 있던 그 날, 보안서에서 가족을 다 데려다가 보안서 대기실에 쳐 넣길래 그 가족은 왜 이렇게 할까 생각했다고 해요. 몇 시간 후, 가족을 풀어주면서 나올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수군수군 해서 알아보니 자기 아버지가 처형되었던 것이에요. 그런 식으로 죽였어요. 가족들은 나라에 항의하거나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죄를 짓고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북한에서는 일단 잡히면 반항을 못 해요. 나라에 반항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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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북도 금천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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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진료는 병원에서 받을 수 있어요. 치료는 해 주지만 약 자체는 병원에서 다 나오진 않아요. 개인이 사야 해요. 병원에서 그렇게 요구해요. 병원에서는 주사 한 대, 포도당 10% 몇 대, 약 몇 대 등등 환자 측에 다 가져오라고 해요. 수술을 해야 한다면 수술 날짜까지는 다 잡아줘요. 하지만 수술에 필요한 물품과 약은 개인이 다 구해와야 해요. 진료만 받아도 뇌물을 주는 경우도 있어요. 뇌물을 주면 진료를 잘 봐주거든요. 돈을 주지는 않으나 담배 한 갑 정도 주곤 해요. 병원 시스템이 존재하고 의사도 할 일은 있어야 하다 보니까 공짜로 진료를 봐주고 약 처방을 내려 주기는 하나 더 높은 수준의 진료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뇌물을 줘요. 아무래도 뇌물이 들어가면 병원에서 잘 챙겨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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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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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병원에서 수술 받았어요. 수술 같은 것은 대체로 다 무료예요. 수술 받고 그에 대한 약 처방을 받으면 그건 본인이 해야 하죠. 병원에서 ‘붕대를 사오라’, ‘약을 사오라’, ‘반창고 사오라’ 하면 장마당에 가서 그걸 구해 주면 치료는 다시 의사 선생들이 해줘요. 치료에 필요한 재료나 물품은 다 본인이 구해와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병원이라는 게 진찰과 치료는 해 주는데, 거기에 필요한 것들은 전부 밖에서 환자가 구해와야 하는 식이에요. 무상치료제? 그런 건 없어요. 무슨… 중앙당 간부들이야 있겠는지 몰라도 우리 일반 사람들은 절대 아니에요. 그건 언제부터 없어진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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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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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배가 아프면 거기에 맞는 약을 먹잖아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돈이 없다 보니 어디 가서 침을 맞곤 해요. 그래서 북한에서는 웬만한 사람은 다 침대를 꽂아요. 침 맞으러 가면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침대를 꽂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의학적으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집에서 앉아 놀면서 침대를 꽂는 사람이죠. 할머니도 침대를 꽂는데 꽂고 나서 배를 문지르고 그렇게 해서 낫게 해줘요. 그런 식으로 치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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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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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주사 같은 것도 약국에서 다 살 수 있고 하니까 아프면 집에서 주사를 놓곤 해요. 개인이 주사를 그냥 놓는 거죠. 집안에 누가 아플 때 본인들이 의학적 지식이 있으면 주사 놓고 그래요. 이런 의학적 지식은 전문적인 게 아니에요. 민간 요법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냥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죠. 북한에서는 그렇게 집에서 알아서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정말 이상 증상이 있고 아주 세게 아프지 않은 이상은 병원에 잘 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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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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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치면 편의점 같은 곳에서 기본적인 약을 팔아요. 보통 그렇게 구할 수 있는 약은 다 중국에서 나온 약이에요. 제대로 된 약이 아닌 거죠. 기한이 지난 약이라든지, 아니면 뭔가 부족한 약이에요. 약을 파는 사람도 약사가 아닌 일반 사람이고요. 약도 그렇게 파는데 그 약이 어떤 약인지, 어떤 효과를 내는지는 몰라요. 약을 사는 사람이 대충 자기가 이런 약이 들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약을 사는 거예요. 제가 기침 날 때는 이 약을 먹으면 괜찮았다고 하면 그런 곳에 가서 그 약을 달라고 해요. 거기서 약을 파는 사람은 그냥 그 약을 달라는 대로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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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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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피임해요. 콘돔 같은 경우는 유엔에서 ‘유엔상품’이라고 해서 들어와요. 그리고 그런 약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다 들어오기도 하고요. 그런 거 못 사용하는 어린 애들 중에서는 일 벌여 놓고 애 없애려고 임신중절 부모 모르게 하다가 죽는 경우도 많아요. 북한은 병원에 가서 하는 게 없어요. 다 개인집에 가서 해요. 그런 개인 집은 병원에서 일하다가 나온 사람들이 하는 곳이에요. 그렇다고는 해도 집이라는 게 시설이 열악하지 않겠어요? 오염되고 그렇다 보니까 패혈증도 와서 죽기도 하고 출혈이 너무 심해도 의사 선생이 뭘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죽기도 하고, 좌우간 죽는 사람이 있어요. 피임의 경우 여자들은 자궁에 고리를 해서 넣는다고 말해요. 그런 것도 다 개인에게 가서 하죠. 그것도 금, 은, 구리 등이 있는데 가격이 다 달라요. 그게 제일 흔하고 그 다음에 외국에 나가서 의사 생활하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팔에다가 뭐를 넣어 주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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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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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에 있는 도 병원 시설은 초음파가 있고 엑스레이 기계도 있어요. CT도 있는데 MRI는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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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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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자기 집에서 아픈 사람을 진료해 주기도 해요. 그렇게 진료해주는 사람은 의사 자격증이 있지만 병원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에요. 의사로 일하다가 은퇴한 사람도 있고 아니면 의학대학 졸업했지만 의사를 안하고 그냥 개인적으로 다른 일을 했던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집에서 진료해주는 사람들이 오히려 돈을 더 잘 벌어요. 병원은 공식적으로 환자들에게 돈을 받지 못 해요. 그런데 집에서 개인적으로 진료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치료에 따른 얼마만큼의 대가를 받아요. 편하게, 어디의 제재도 없어요. 죽을 병이 아니면 개인에게서 다 치료를 받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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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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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원 양성소에는 들어가기가 힘들어요. 모두 선호하는 곳이라 그래요. 그런데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학교 졸업할 때쯤 노동과에서 우리 명단을 가지고 여기 저기 배치해요. 그때 노동과에 돈을 주면 갈 수 있어요. 제가 들어갈 때에는, 간호원 학교라고 그냥 불렀는데 당시 중국 돈으로 300위안을 주면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게 공통이었죠. 어쨌든 뇌물을 줘야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전에는 2년제였는데 1년제로 바뀌었어요. 결혼해도 일을 계속 할 수 있어요. 그건 자기 마음이에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굳이 간호원을 계속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간호원은 다 여자예요. 남자 간호원은 본 적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 남자가 간호원 한다는 말을 듣고 신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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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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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약국이 몇 군데 운영되고 있기는 해요. 거기서도 사지만 시장에서도 사기도 해요. 그리고 개인이 파는 곳도 있어요. 그런 게 많아요. 대체로 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파는 것 같아요. 병원에 있던 사람들이나 약사 같이 약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죠. 만약 제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알려주고 약을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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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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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에게 진료를 잘 받기위해 담배 한 갑이라도 줘야 해요. 안 주면 성의껏 봐주지 않아요. 약은 받지 못 해도 처방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정부가 약을 대주지 못 해요. 그래도 의사가 왜 병원을 지키고 있냐 하면, 그래도 남자 의사들 같은 경우는 출근하면 진료해 줄 때 담배 한 갑이라도 받으면 하루에 두, 세 갑만 받아도 입쌀 1kg은 살 수 있어요. 그러면 이것이 가정에 대단한 도움이 돼죠. 북한 사람들 자체가 ‘내가 오늘 쌀을 몇 kg 벌었어’라고 항상 생각해요. 먹는 것이 목전에 다 이르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쌀로 바꿔서 계산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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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199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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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몇몇 의료 종사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국가에서 정해줘서 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대부분의 의료 종사자는 헌신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환자를 대한다고 생각해요. 북한 병원에서 약 같은 것을 의료인들이 훔쳐다가 장마당에 팔고 이런 것들을 연결해서 본다면 또 다르겠지만, 그래도 의료인 모두 환자에 대해서 헌신적인 마음은 가지고 있어요.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때로는 생계를 유지하는 그런 것을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아주 인간성이 없다고 표현하기에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함부로 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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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200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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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물티슈나 손소독제 이런 것도 귀하다 보니까 방역 대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고 봐요. 코로나19 진단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보고요. 그냥 추측으로 발열이 있으면 코로나19 증상자로 분류하고 그런 식일 것이에요. ‘열이 몇 도 이상이고 어디가 아프면 유증상자다’라는 식으로 보는 수준일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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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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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문이 닫혔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지 근심을 가져요. 모든 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중국을 통해 들어와요. 입고, 쓰고, 먹고 하는 것은 모두 중국에서 들어오죠. 그런데 중국 문을 닫으면, 세관으로 쌀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공업품도 다 들어와요. 옷, 신발, 심지어 약품까지도 다 중국을 통해서 들어와요. 그런데 중국 문을 닫으면 그 다음에는 힘들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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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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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설비도 오래되고 시스템도 안 되어있고, 더구나 국가에 돈이 없으니까 정말 한심한 수준이에요. 그러니까, 일단 확진자가 생겼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예전에 하던 것처럼 감염병 돌면 사람들을 집 안에 격리하고 소등하게 하고 아예 밖으로 못 나오게 해서 못 퍼지게 하는 식으로 하지, 백신 같은 것으로 치료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어요. 국가에 돈이 없으니까, 약이 없다 보니 격리된 사람들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고 그런 식이죠. 북한이 백신을 무슨 돈으로 수입해 쓴단 말인가요? 북한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있다면 치료는커녕 그냥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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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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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휴대전화로 매일 코로나19 관련해서 확진자니, 사망자니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휴대전화로 다 뜨니까 ‘아, 죽었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데 북한은 그렇지 못해요. 북한에서는 보도에서 코로나19 관련 확진자나 사망자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사람들 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말하면 사람들이 공포심에 다 달아날까 그래서 그런지 북한에서는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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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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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북한 내 3, 4명의 사람과 통화를 자주 해요. (2021년) 4월 초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한 번 코로나19에 대해서 제가 물어본 적이 있어요. 영상통화를 했는데 상대방은 산에서 통화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마스크를 끼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북한에도 마스크가 있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북한에서도 마스크를 낀다고 하면서 마스크 끼지 않으면 못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스크를 왜 끼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급성 폐렴이 돌고 있는데 그게 전염성이 강해서 막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고 세계에 공개했잖아요? 그런데 그 코로나19를 급성 폐렴으로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거기는 코로나19 없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중국과 한국에는 코로나19가 많다고 하는데 자기네는 없다고 하면서, 하지만 급성 폐렴은 있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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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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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일부터 20일까지 혜산을 완전히 봉쇄한 적이 있어요. 일체 집 밖에 못 나온다고 공문을 발표했어요. 집 문 밖에 아예 못 나가게 했죠. 격리되었다고 해서 굶어 죽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단식 투쟁이 있었어요. 집 밖으로 못 나오게 하니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 한 것이죠. 예를 들어, 인민반장이 먹을 것을 나눠주는 과정에 사람들이 “야! 우리는 굶어 죽으면 굶어 죽었지 너네들이 주는 것은 안 먹는다!”라고 아마 이런 식으로 했던 것으로 알아요. 그러고는 음식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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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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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은 그런 거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저 흔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라고 말하죠. 그런 병이 돌면 도는 거고, 그냥 막 나가 돌아다니곤 했어요. 사람들은 감염병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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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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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시냇물에 빨래를 해요. 그리고 또 그 물을 먹어요. 그 물을 먹을 때는 한 1년 반 정도는 계속 설사하다가 그 이후부터는 적응이 되어서 그 이후부터는 물 고생을 하지 않아요. 마을 주변에서는 수도가 나오지 않으니까 우물물, 시냇물을 먹고 살 수밖에 없어요. 대책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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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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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지 않아요. 화장실을 지을 형편이 못 되거든요. 하수도 관도 제대로 없어요. 제가 살던 집은 어떻게 했냐 하면, 전실을 거쳐서 기본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전실 구석에다가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서 널판자 얹혀 놓고 그렇게 화장실을 만들어 놨어요. 거기서 변을 봐요. 그리고 한 2, 3일 있다가 변 본 것을 쳐내야 해요. 길을 따라 한 쪽 편에 집들이 있고 우리집도 있어요. 반대편은 시냇물, 도랑물이죠. 변 본 것들이 지하로 해서 우물을 다 흐리게 해 놔요. 그래서 위생방역소에서는 여기 우물을 먹지 마라고 해요. 만약 비가 오게 되면 물이 스며들어서 오염된 물들이 우물로 나오게 되고 그 물을 사람들이 먹게 되죠. 저도 그 물을 퍼먹고 살았어요. 지금 현재도 사람들은 그 물을 먹고 살아요. 끓여서 먹지도 않아요. 그래서 북한에는 대장염이 많아요. 해충도 많고요. 아직 북한에는 하수도관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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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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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는 농촌부터 시내까지 텃밭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심어요. 몰래몰래 심죠. 양귀비 같은 것은 3월 28일이 심기에 적기예요. 그리고 7월에 진액을 받아요. 보통 한 집에서 2, 3g, 많게는 5, 6g씩 아편을 건사해요. 그게 만병 통치약이에요. 전문적으로 아편만 맞아서 막 부들부들 떨고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개인들은 보통 마약 중독은 아니고 감기 걸렸다거나 열이 나거나 센 통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편을 맞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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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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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함북도, 함남도 쪽은 거의 다가 빙두를 했다고 봐도 되는데, 자강도는 그 정도는 아니고 한 70%정도? 그 정도가 한 번쯤은 빙두를 했다고 봐요. 빙두는 구하기가 쉬우면 쉽다고 할 수 있어서 많이 사용하죠. 돈 있으면 빙두를 다 살 수 있어요. 예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많이 공유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심하게 단속을 하니까 진짜 비밀리에 하더라고요. 제가 올때까지는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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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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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언니도 일을 할 때 머리에 혈전이 왔다가 빙두를 하면 아프던 게 진통제를 먹으면 낫듯이 머리가 팍 하면서 맑아 진다고 하면서 고통이 없어진다고 하더라고요. 빙두가 진통제, 흥분제 그런 역할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죠. 그게 병 치료도 돼요. 혈관을 확장시켜서 혈액 순환도 잘 되게 하죠. 그리고 젊은 애들은 빙두 하고 남은 물을 얼굴에 바르면 살결도 좋아지고 상처도 잘 낫는다고 해서 발라요. 아편은 피를 무르게 해요. 아편을 맞으면 피가 잘 돌면서 아픈 곳을 없애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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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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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은 량강도 혜산 쪽에서 많이 해요. 그래서 량강도 쪽 보안서에서 아편을 많이 단속하니까 대체로 양귀비 농사는 함북도에서 많이 해요. 무산군, 연사군, 하대군 쪽에서 산에다가 감자꽃 사이에 심어요. 량강도에서도 갑산군 쪽에 갱도 작업하는 사람들이 좁은 갱도 안에 들어가서 쭈그리고 일 하고 하니까 일 하고 나오면 몸이 아파서 아픈 부위마다 아편으로 약침 같은 거 하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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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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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에서는 아편보다 빙두를 훨씬 더 많이 했어요. 빙두 같은 경우에는 혜산 사람 50% 이상은 해보지 않았나 생각해요. 우리 같은 20대 애들 같은 경우에는 흥미 그런 목적으로 하더라고요. 빙두는 밤새 도박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고 20대 같은 경우에는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 ‘한 번 해볼까?’ 이런 식으로 관심 유발시켜서 하곤 해요. 판매자들이 많았는데 그 말은 수요자도 많다는 뜻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빙두는 그냥 기분 좋게 만들고 밤잠도 안 오게 한다더라고요. 몸에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어요. 알면서도 사용하죠. 호기심도 있고 그걸 하면 그 당시는 기분이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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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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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기로는 회령 사람들은 빙두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일반 사람들도 접하기 쉬워요. 인구 중 몇 %가 한다고 딱 말하기는 힘들어요. 농촌에 사는 사람이랑 시내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랑 갈리니까요. 농사짓는 사람은 빙두를 접하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그걸 사는 게 비싸니까요. 하지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빙두를 사용해요. 빙두 자체를 접하기는 쉬워요. 일단 누군가 빙두를 사려고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어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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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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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2014년까지는 마약을 밀수로 해서 중국으로 많이 보냈어요. 평양 상원이나 함흥에서 마약을 많이 만들었죠. 빙두예요. 그때는 장사가 진짜 잘됐어요. 빙두를 중국에서 요구하니까 북한에서 계속 만들었죠. 그런데 2016년부터는 평양 상원 약 공장이 없어졌어요. 그런 말이 돌기도 했어요. 상원에서 제조해서 당 간부들에게도 조금씩 공급을 한다고요. 상원에서 제조한 것은 나라에서 한 것이에요. 함흥에서 만드는 것은 개인이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마약이 막 판매되고 그러니까 나라에서 상원 약 공장을 파괴했어요. 없애 버렸죠. 명칭은 없어졌지만 비밀리에 지하에서 계속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함흥에서 약을 많이 만들다 보니 무산 사람들도 모조 마약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약 질이 낮아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중국에서 북한에 약을 요구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2016년도쯤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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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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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이라는 인식보다는 치료용이라고 더 생각했어요. 특히 운전자들 같은 경우는 피곤을 풀기 위해서 빙두를 많이 썼어요. 빙두는 조금 수준 있게 사는 사람들이 쓰고 아편 같은 것은 일반인들이 많이 썼어요. 그래도 아편 중독자 이렇게 말 할 정도로 많이는 안 쓰는데 100명 중에 몇 명 쓰는 정도예요. 제 고향인 평안도를 놓고 봤을 때 평성 주변, 즉 한국의 수도권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거기는 마약 하는 게 힘들어요. 왜냐하면 엄청 통제하거든요. 그런데 북쪽으로 오고 나서 보니까 아편 밀수가 많고 아편 재배도 많더라고요. 북쪽은 통제가 덜하니까 그래요. 저는 평안남도에서 함경북도로 왔어요. 두 지역은 삶에 차이가 있더라고요. 평안도 쪽은 통제가 잘 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요? 그런데 국경이 가까운 사람 밀도가 덜 한 지방으로 오고 보니까 사람들이 마약을 치료제로도 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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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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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아편을 맞아요. 우리 옆집에 살던 남자도 아파서 아편을 맞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12살, 16살이었어요. 얘네들도 아편을 했어요. 아편을 해도 부모들이 뭐라 하지 않아요. 아프다고 하면 그냥 부모가 애들한테 먼저 아편을 놔줬어요. 애들이 아프다고 하면 아편 맞으라고 애들에게 말하곤 했죠. 북한에서는 애들이 아편을 맞고 있는 모습을 어른이 봐도 별 말 안 했어요. 오히려 아프다고 할 때 마다 아편을 맞으라고 더 재촉해요. 나라에서나 하지 말라고 하지, 마약은 이미 북한에서 일상화 되어있어요. 사람들은 당국에 대해 ‘너네는 대책도 없으면서, 그래 그렇게 말해라. 우리는 우리끼리, 계속 하던 대로 간다’ 이렇게 생각해요.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른들이 아편을 맞으라고 해서 시작하게 돼요. 그렇게 아편 맞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아편을 쓴다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약이 없으니 쓰는 거라고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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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홍원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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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도 알아요. 알고 있으면서도 놔둘 수밖에 없어요. 통제를 한다고는 하나 강력하게 통제할 경우 자신들이 눈감아주면서 받아온 뇌물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기에 적당히 무마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거죠. 방관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마약을 하거나 거래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바치기에 간부들도 먹고 사는 것이라 그래요. 나라의 정책과 법에서는 마약을 한 자는 사형 등을 통해 강력하게 처벌한다고는 하나 일선에서 검열하거나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을 처벌하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오니까 중간에서 덮어버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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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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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쟁이는 국가적으로 제일 중범죄인이에요. 많이 하는 사람은 교화를 10년씩 보내기도 하죠. 마약하면 수명이 감소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교육해요. '혁명과 건설에 도움이 되지 못 한다'고, '마약하면 제 정신이 아니니까 모든 면에서 다 마약은 완전히 악성이다'는 교육은 나라에서 해요. 마약 범죄에 대한 거 강의하고, 마약이 나쁘다는 거 강의하고, 마약 하는 사람들 신고하라고 강의하고, 그런 강의를 계속 해요. 재활 교육이요? 그런 것은 없어요. 국가가 치료해주거나 그런 것은 없고, 자기 혼자 망하는 것이죠. 마약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는 집에 것도 다 들어내 팔아요. 마약 하는 사람은 마약에 질이 들어서 교화 갔다 와서도 또 마약하고 그렇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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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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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직장생활을 해도 월급 같은 것이 없어요. 무급으로 다녀야 하고 안 다니면 오히려 무직으로 걸렸어요. 일을 해도 먹고 살 수 없으니 도저히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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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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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화폐개혁이 있었어요. 화폐개혁하고 난 직후에는 2,225원으로 식량을 사면 다 먹지 못할 만큼 살 수 있었죠. 노동자 한 명이 그 돈으로 한두 달은 살 수 있었어요. 화폐교환 초기에는 쌀 1kg도 4, 5원밖에 안 했어요. 그런데 화폐교환 이후 한 6개월 지나면서부터 경제가 제대로 안 돌아가면서 이 돈이 술 한 병 값도 안 되어버렸어요. 돈의 가치가 확 떨어지면서 임금을 받아도 살 수 있는 게 없었죠. 요즘은 노동자들이 월급을 바라지도 않아요. 술 한 병도 못사는 돈을 어디에 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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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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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노동과에서 직업을 배정해줘요. 배치 받은 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뇌물을 주고 안 나가기도 해요. 돈이 없는 사람은 안 나가고 뻐기다가 잡혀서 노동단련대에 끌려가기도 해요. 나라에서 배정해 준 직장에 다녀도 임금을 거의 주지 않아요. 사실 북한엔 직장이 많이 없어서 학교를 졸업해도 바로 직장에 배치되기 힘들어요. 직장에서는 임금을 받기도 하나 먹을 쌀을 사기도 힘들 정도로 적은 금액이에요. 오히려 일을 하면서 직장에 ‘과제’라는 명목으로 각 기념일마다 식량이나 물건을 구해서 바쳐야 했어요. 북한에서는 나라가 정해준 직장일을 하면서 먹고사는 것은 불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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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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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닌 돌격대는 10년을 복무하는 곳이에요. 돌격대도 다양해요. 특히,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돌격대가 많아지고 있어요. 북한에는 기계가 없어 사람이 다 해요. 젊은 사람은 남아 돌고 일은 많으니까 자연히 돌격대도 많아졌어요. 군대는 전선을 지키는 개념이라면 돌격대는 순 공사만 하는 곳이에요. 돌격대 안에도 계급이 있어요. 돌격대를 ‘반군사’라고도 부르죠. 완전한 군대는 아니고, 그런데 일상적으로 보면 군대보다 더 힘들고 그래서 그래요. 군대는 일요일에 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돌격대는 일요일에도 일해요. 1년 365일 일한다고 보면 되는 거죠. 남녀 비율은 7:3 정도 돼요. 제 기억에는 3년 동안 돌격대에 있으면서 총 2번 돈을 받았어요. 북한 돈으로 4천 원이었어요. 쌀 1kg을 살 수 있는 돈이죠. 여기서 당 자금이니 뭐니 해서 자르는 게 엄청 많았어요. 그렇게 하고 나면 실질적으로 2천 5백 원 정도를 받는 셈이에요. 그래서 이런 돈은 신경도 안 썼어요. 주거나 안 주거나 상관없는 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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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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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동맹은 청년, 즉 직장을 다녀도 출가하지 않은 18세부터 한 35세 이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가입해야 해요. 출가하지 않은 독신을 청년이라고 부르죠. 직맹은 직장을 다니면서 출가한 사람이나 나이가 있는 사람이 가입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직장에 청년동맹도 있고 직맹도 있는 것이죠. 쉽게, 결혼의 여부에 따라 직맹이냐, 청년동맹이냐가 갈린다고 보면 돼요. 청년들은 국가에서 부려먹기가 수월해요. 가족도 없고 하니 동원판에 동원하거나 급한 일 시키기도 쉬워요. 그래서 청년동맹은 위에서 많이 쪼여요. 청년동맹은 아주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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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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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은 많은데 농장에 일할 농장원은 없었어요. 땅은 넓은데 일할 사람이 얼마 없으니 농장에서 농사 지을 때 그 계절을 놓치지 말자고, 그런데 사람은 없지 하니까 ‘지원노력’을 써요. 주로 학생들이 봄에 동원돼요. 봄에 동원되면 하는 일은 모내기 같은 것을 해요. 농촌에 땅이 아주 넓다 보니 학생들을 동원해도 그 큰 면적을 다 관리하지는 못해요. 김매고 그런 것을 다 하지 못 하죠. 농사철에는 중학생부터는 다 동원돼요. 대학생도 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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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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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쪽에 탄광이 많아요. 제가 평안남도 있을 때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자원해서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일 힘든 곳에 가겠다고 지원하는 경우도 많아요. 아직도 그래요. 그런데 북한에서도 북쪽(량강도, 함경도)에서는 제 고향과 달리 그런 말을 잘 믿거나 따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걸 보고 자원하고 싶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 때 제일 힘들었던 게 ‘중앙당 속도전돌격대’라는 것이었어요. 거기에 자원 진출을 많이 했는데 이것은 군인보다 더 힘든 일을 하는 곳이라고 알려졌죠. 저 자체도 북한에 있을 때 제일 힘든 것 자원해서 해보겠다고 ‘국방훈련’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자원하기도 했어요. 저는 북한 있을 때 그런 것을 강제적으로 해 본적이 없어요. 오히려 저는 ‘나를 뽑아 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고 제가 뽑혔죠. 뽑히면 좋은 마음으로 으쓱하는 기분으로 갔지 싫다는 생각을 하거나 강압적으로 가지는 않았어요. 돌격대 같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기숙사를 제공해서 재워 주기도 하니까 그런 측면에서 고아들이 그런 것에 많이 자원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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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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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저는 보위부에 입대하려고 준비했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한국에 먼저 와 있다 보니까 보위부 입대가 불가능했어요. 어머니가 한국으로 갔으니 토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북한이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안 것은 오래됐어요. 하지만 이 땅에서 태어났으니까 ‘이것은 내 운명이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살아왔는데 대학교 졸업하고 보위부 들어가려 했다가 일이 잘 안 풀리고, 그러다가 보위부에 잡혀 감방에 들어가고 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감방 안에는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중국 심양, 장춘, 장백 등지에서 잡혀 북송된 사람들이었죠. 그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제가 힘들게 군사복무 10년 하고 대학 공부까지 하고 나서도 제가 희망하는 직업도 못 얻었을뿐더러 생계도 힘들고 그랬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숙명, 운명으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 후로 제가 눈이 트였어요. 그렇게 해서, 솔직히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제 운명을 다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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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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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농장원이었어요. 국가에서 일단 정한 것은, 농장원 자식은 농장으로, 탄부 자식은 탄광으로 가도록 했어요. 부모의 직업을 자식도 대대손손 따라 가는 거죠. 그 중에서도 기본, 농장원이 가장 세게 대물림해야 해요. 2014년도인지 2015년도인지 방침이 내려왔어요. 농장 자녀들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서 군대가서 군관 하는 것도 농장원 자식은 안 된다는 식으로 바뀌었죠. 농촌 진지를 강화해야 하는데 농장에 너무 인원이 없다고 하면서 김정은 방침이 내려온 적 있어요.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이렇게 하는 게 전보다 조금 더 어려워졌어요. 결혼할 때 농촌에 시집오고 하면 계속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니 그것 때문에 결혼 안 하려는 것도 많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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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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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노임을 바라지도 않았고 받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 해요. 노동자 한 명당 북한 돈 2,000원 정도 월급으로 받을 때도 있었으나 그 돈으로는 쌀 500g도 사지 못 해요. 한 달 노동에 대한 대가로 받는 값이 쌀 500g도 못사는 가치면 있으나 마나 한 돈인 거죠. 이런 돈 타 봤자 뭘 하겠어요? 공장같이 나라에서 주는 일만 믿고 생계를 유지하는 건 생각도 못 해요. 살기 위해서는 장마당에 나가던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해요. 월급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일하는 곳에 돈을 내야 했죠. 일하는데 돈을 반대로 바쳐야 한 거죠. 직장에서 이래저래 내라는 돈이 많았어요. 그래서 생계를 위해 부부가 같이 노력해야 했어요. 저는 퇴근하고 나서 따로 다른 사람들 짐 나르는 일을 해주고 돈을 받곤 했어요. 그래도 따지는 사람이 없어요. 세뇌정책 때문에 생각도 못 해요. 나라에서 불평하지 못하게 만들어 놨어요. 예를 들어, 제가 노력동원 못 나가겠다고 기업소 지배인이랑 다투면 법기관에서 와서 저를 잡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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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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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지가 러시아에 벌목으로 나가셨어요. 해외로 나가는 것도 인기가 많아요. 그렇게 나가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어요. 수속하는데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이 사람을 보낼 수 있다’라는 담보도 받아야 하니까 그걸 담보해 줄 수 있는 간부들에게도 돈을 줘야 해요. 비자를 받는 것도 돈을 넣어야 하고… 밑천이 많이 들어가죠. 해외로 나가면 돈을 좀 버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생활에 보탬이 되는 거죠. 그런데 돈은 돈이고, 머리 상식이 바뀌어진 게, 아버지가 되게 세련된 그런 쪽으로 많이 나가는 것 같아서 우리 머리랑 달라지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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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양직할시
- 남
- 1960년대 출생
- 199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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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이라도 북한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니까 똑같았어요. 그 곳에서 말하는 것, 보는 것, 생활하는 것 모두 북한과 똑같았죠. 쿠웨이트라고 해도 우리는 현지 TV도 접할 수 없었어요. TV라고 하나 있는 것도 전부 김일성 록화물만 틀어 주더라고요. 신문이 있다고 해도 그 나라 말로만 되어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었어요. 그나마 외국이기는 하니까 외국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전부였죠. 정보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니 북한과 마찬가지였어요. 또 깨달은 것은, 외국에 나와서도 북한과 똑같이 생활총화도 하고, 김일성 일가에 대한 학습을 받고 강연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지금도 해외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은 당연히 하고 있을 것이에요. 그거 안 한다면 북한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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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양직할시
- 남
- 1960년대 출생
- 199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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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나가는 것이 뭐가 문제냐면, 제가 그곳을 탈출할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에서 계속 노동자가 들어와서 3~400명 정도 있었어요. 800개의 눈이 있다는 말이죠. 800개의 눈에 안 들어온다고 쉽게 장담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노동자는 모두 작업반, 조별로 모여 생활하기에 누가 없어지면 바로 알아챌 수 있어요. 북한 사람들은 평생 살면서 서로 얽히고 설키는 관계 속에서 감시하고 살아가는 체제 속에 살아왔어요. 당에서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혼자 사라졌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평생동안 철칙처럼 사상 교육을 받고 사는 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혼자서 마음먹고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기 힘들어요. 여권은 모두 간부가 가지고 있어요. 제가 탈출할 때에는 여권 없이 탈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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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양직할시
- 남
- 1960년대 출생
- 199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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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는 전혀 못 받았어요. 저는 거기서 5개월 동안 일했지만 단 한 푼도 받지 못했죠. 처음 평양에서 출발하기 전 국가에서는 우리에게 월급으로 120달러를 준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쿠웨이트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넘어도, 두 달 째에도 월급과 관련한 어떠한 말이나 기색도 없었어요. 제가 일한 지 석 달 차 되던 때 외국인들과도 함께 일했어요. 우리는 돈을 못 받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얼마씩 받고 있냐고 물어보니 650달러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 회사도 우리의 몫으로 실질적으로 인당 650달러 수준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죠. 물론, 우리가 공동으로 쓰는 돈을 제해도 120달러는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침 8시부터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일하도록 하는 것도 있었어요. 과도한 노동이죠. 전 이런 것이 인권 침해라고 봐요. 당시 저는 하루 보통 14~15시간씩 일해야 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일한시간을 평균 내보면 그랬어요. 그것도, 휴일도 없이 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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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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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북한은 시장경제로 변했어요. 예전에는 국가가 먹여 살렸지만, 지금은 국가가 하나도 못해주고 있어요. 사람들은 다 자립해서 살아가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시장을 활용하죠. 북한 사람들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도 겪고, 2009년 화폐개혁도 겪으면서 많은 고생을 해봤어요. 이제는 북한 사람들도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북한 사람들은 ‘국가를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돈 있는 사람들, 장사꾼들은 있는 돈으로 전부 상품을 사들였어요. 왜냐면 북한 내에서는 상품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니까요. 물가가 자꾸 올라가다 보니 사람들은 돈 있으면 상품을 사들였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장사를 하지 않더라도 식량을 많이 비축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식량은 아무 곳에서나 팔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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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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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지어 생산물을 바친다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에요. 토지가 농장원 것이 아닌데 나라에 바친다는 게 되지 않아요. 자기 생산물이 아니잖아요? 나라 땅에서 일을 하는 근로자일 뿐이지 자기 땅에서 나온 자기 생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구조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우리 친척도 농장원이었어요. 친척의 경우에는 전혀 돈을 받지 못했어요. 쌀을 조금 받는 것 빼고는 아무런 배급도 없었고요. 그래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쌀 농사를 지으면 1년 중 가을철 추수 때 자기가 먹을 쌀을 훔쳐요. 추수기간 탈곡은 보통 밤에 해요. 그래서 정미소에서 몰래 자기 가족이 먹을 쌀을 빼돌리는 거죠. 그런 식으로 1년 먹을 식량을 홈쳐야만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4, 5월이 오면 먹을 것도 떨어지고 그래서 풀뿌리를 캐서 먹어야 해요. 농사를 짓지만 목표한 만큼 생산량이 나오지도 않기에 보통 1년에 1인당 100kg을 배급 받는다고 한다면 실제로는 50kg도 못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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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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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생산하는 정곡이 없고, 들어오는 것은 군인들에게 돌아가다 보니 국민들에게 줄 식량이 없어요. 밀수도 지금 끊겨서 거의 못 해요. 오직 소토지에 생계를 유지하며 먹고 살아요. 소토지로 해서 그래도 다 지금은 목숨줄은 연명하고 있어요. 최근에도 고난의 행군 수준으로 힘들다고 하는데, 북한에는 산에 나무가 없어요. 다 소토지 밭이에요. 개인들이 그저 북한에 산 있는 곳에는 산 꼭대기까지 다 땅을 뚜져가지고 곡식을 심었어요. 고난의 행군때는 못 먹어 굶어 죽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 같이는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에요. ‘산에서 소토지를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 농사를 어느 집이든 다 지어요. 누가 소토지 밭이 없다고 하면 "야… 너는 죽어야겠구나!"라고 말하곤 해요. 그럴 정도로 사람들이 근로 정신이 강해졌어요. 그것을 먹으면서 그래도 장마당에 나가서 조금씩 장사하면서 보태면 배부르게는 못 먹어도 1년은 버틸 수 있어요. 무산은 기본이 옥수수와 감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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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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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 비료 같은 경우에는 많이 봤어요. 그리고 저는 대한민국 비료 장사도 했어요. 복합비료 같은 거요. 많이 팔았어요. 한국 비료가 두 가지였어요. 복합비료하고 또 하나 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북한은 비료가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알을 여물게 하는 요소와 식물 키를 크게 하는 질안이라는 거 두 가지 밖에 없죠. 그런데 한국 비료는 영양제더라고요. 각종 재료가 다 들어간 복합비료였어요. 이런 건 한국에서 지원해 준 것 같았어요. 나라에다가 지원해 준 것을 나라에서는 도 농촌경영위원회에 보내고 거기서 매 군마다, 군 농촌경영위원회, 거기서 또 군 관리위원회에 보내요. 그렇게 들어와서 마지막에는 분조장, 작업반장에게 돌아가죠. 거기에 작업반이 몇 개씩 있고 그 작업반에는 또 몇 개 분조씩 있어요. 최근에는 분조는 가족제로 해요. 두, 세 집이 모인 게 가족제이죠.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 몇 %는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 몇 %는 자기네들이 먹는 구조예요. 말로만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도 열심히 하면 그래도 괜찮겠구나 싶겠지만, 실제 농사 지어서 뭐 바치고 뭐 바치고 하다 보면 오히려 생각보다 더 없으니까 되레 자기 몫이나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바쳐야 해요. 그러다 보니 농장에서 비료를 주면 농장에 비료를 뿌리는 척하면서 1/3 정도는 몰래 빼돌려 저녁에 집에 올 때 싸 가지고 와요. 그렇게 들고 온 것을 자기 밭에다가 뿌려요. 그래서 농장 밭은 소출을 따지고 보면 수확량이 저조할 수밖에 없어요. 나라 밭에 김 매고 비료 뿌려야 하는 걸 자기 밭에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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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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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국가로부터 각 기관이 1년 동안 해야 하는 계획을 받아요. 농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비료도 없고, 농약도 없고, 자금도 없으니 어떻게 그 계획을 지키겠어요? 그렇다 보니 농장원들을 동원해 ‘액벌이조’라는 것을 조직해 온 동네 산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게 한 후 이것을 중국에다 팔아먹었어요. 그렇게 해서 필요한 물자를 구해 농사를 지었죠. 즉, 농장원 일부는 벌목해서 중국에 팔고, 그 돈으로 비료 등 농사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면 나머지 농장원들이 농사를 지은 것이에요. 이렇게라도 해야 나라에서 지시한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어요. 기계 같은 건 없어요. 오로지 인력으로만 농사를 지어야 했어요. 사실상 기계도 없을뿐더러 기계를 돌릴 기름 한 방울 없는데 어떻게 기계를 쓸 생각을 하겠어요? 당장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요… 이것은 아마 북한 거의 모든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문제일 것이에요. 그나마 일부 곡창지대는 국가에서 일부 지원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량강도 같은 경우는 나라에서 ‘스스로 먹고살아라’는 식으로 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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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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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나 황해남·북도, 자강도에서는 장마철 홍수 피해가 많이 발생하는데 량강도 혜산 지역은 비가 적게 와요. 농작물 피해가 가장 많은 지역은 황해남도와 함경남도이죠. 량강도는 고산지대이다 보니 물이 빨리 빠져요.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끼고 있어서 물이 그쪽으로 다 나가요. 혜산 쪽은 물난리 피해를 잘 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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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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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물론이고 해마다 강, 하천 정비라든가 사방공사를 해요. 사방공사는 강 옆에 돌담이나 둑을 쌓아 물이 정상적으로 흐르게 하는 것을 말하죠. ‘장마철피해방지대책월간’이라는 것이 있어요. 7, 8월 두 달을 장마철 피해와 관련해서 그 월간을 만들어 놔요. 방지 대책은 잘 세우죠. 그 이유는 ‘당과 국가의 결정지시’라는 게 있기 때문이에요. ‘지도사업요강’이라던가 ‘검찰감시요강’과 같이 자기가 담당한 지역 건물의 상태, 주변 상태, 주위환경 상태를 다 감시하고 대책을 세우게 끔 석 달 전부터 준비해요. 지시가 내려왔는데 만약 그것을 관철하지 않아 물 피해가 났다고 하면 행정처분이 들어가고 더 엄중한 경우에는 법적 처벌이 들어가요. 북한은 그런 것이 강해요. 일단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게 되면 모가지 다 날아가죠. 도구들은 그럭저럭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계화 수단이 부족하니까, 북한에는 장비가 보장되지 않으니까 기술이 필요 없고 순 인력이 다 해요. 인력으로요. 하지만 거기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은 없어요. 쌀이라도 내어 주든지, 돈이라도 주든지, 자본주의 사회처럼 일한만큼 돈을 주는 그런 것이 없어요. 강제노동이죠. 그래도 불만을 표현할 수 없어요. 역사적으로 그렇게 계속 해왔다 보니까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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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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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공업품, 식료품, 기름 등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봐요. 실지 무역이 공식적으로 하는 교두, 다리를 제외하고, 거기로는 못하니까, 딱 막았어요. 그러니까 국가에서도 암암리에 밀수를 하도록 승인해줘요. 밀수하기 위해서 국가가 허가해 준 쪽으로 우회해서 가는 것이죠. 국가적인 ‘변강무역’이라는 것이 있어요. 공식 무역은 없으나, 변강에서 국가무역이라는 말의 의미는 비밀 무역을 한다는 말과 같아요. 국가밀수란 노골적으로 밀수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비밀 통로가 있어서 거기서 무역이 이뤄진다는 말이에요. 현재도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만약, 그런 것마저 진짜 없다고 하면 북한은 살아날 수 없어요. 경제가 몽땅 막히고 대홍단, 만포, 혜산 등 무역이 활발히 이뤄지는 곳에서 무역이 몽땅 차단된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살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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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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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쌀이 들어와야 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못 살아요. 제가 볼 때 개인밀수는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군대들이, 군대들 자체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북한에서는 국경경비대가 제일 잘 살아요. 제대할 때는 장가갈 준비 다 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군대를 간다고 하면 국경경비대에 서로 가려고 해요. 연선에서 밀수를 하니까요. 개인 밀수꾼들이 군대한테 고이는 게 있지 않나요? 서로 합이 맞으면 그 군인이 카바를 서주는 것이에요. 지금 북한에 중국 쌀이 있어요. 어떻게 들어오든 들어오는 거죠. 그게 다 어디서 들어오겠어요? 저는 지금 북한에 중국 쌀이 있다고 장담해요. 제가 이때까지 경험해 봤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런 일을 많이 겪었고 그런 일을 했어요. 제가 일할 때 매일 아침마다 위에 보고하는 게 있어요. 중국 쌀이 하루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주민들이 많이 힘들어해요. 엄청요. 간부들도 그 쌀을 먹고 살기 때문에, 법관들도 다 그 쌀을 먹고 살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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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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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일 장사도 하고 채소 장사도 해보고 금속 장사도 해보고 약초도 해보고 두루두루 닥치는 대로 다 해보긴 했어요. 시기마다 달랐어요. 북한도 한국처럼 가게나 시장에서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도나 지방에 내려가서 생산물을 날라서 시내에 도매식으로 뿌리는 사람도 있어요. 예를 들어, 생산지에서 생산물을 거둬서 화물차를 이용해서 물건을 싣고 도시에 생산물이 없으니까 도시에 가서 뿌리고,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산지에서 가져온 가격보다 조금 더 붙여서 다른 곳으로 넘기고, 또 거기서 팔고 그런 식이에요. 국경 봉쇄 이후 솔직히 공업품, 전기제품, 중국에서 들어오는 공산품 그런 물건들은 유통이 잘 안 돌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라던가 그런 것은 중국과 상관이 없어요. 급식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개선이 많이 되었다고 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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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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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장마당에 가 보면 없는 게 없어요. 함북도 쪽으로는 경제, 즉 생활 필수품이 많이 넘어와요. 혜산 세관으로는 대체로 쌀, 기름(콩기름)이 넘어와요. 그리고 중국 맥주도 들어오죠. ‘피주’라고 해요. 그리고 ‘칼파스’도 많이 넘어와요. 칼파스는 중국 소시지예요. 다 중국에서 들어와요. 밀수 기본 지표가 기름, 피주, 칼파스이에요. 이거는 넘어 온지 오래 되었어요. 중국 소시지는 빨간 색이면서 작아요. 한 박스에 50개씩 들어가 있어요. 그런 박스를 하루 저녁에 1천 개씩 넘겨 받고는 해요. 이걸로 요리도 해 먹고 그러는 거죠. 전국 각지로 다 나가요. 일단 받아서 팔면 전국 각지로 다 보내져요. 북한 가보면 중국 소시지 없는 곳이 없어요. 다른 도, 예를 들어, 남쪽인 함경남도나 평양으로도 가봐도 이게 없는 곳이 없어요. 다 중국 소시지이죠. 혜산에서는 값이 싸긴 한데 다른 지역으로 가면서 값이 조금씩 붙어 비싸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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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3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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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십자가와 '대한적십자사'라고 적혀 있는 쌀 포대를 본 적이 있어요. 군에 있을 때도 봤고 사회에 나와서도 봤어요. 군에 있을 때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국의 故김대중 대통령이 있던 시기였어요. 1999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우리는 그것이 쌀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한국에서 온 쌀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어요. 당국은 우리에게 수입 쌀이라고 말해줬어요. 군대에서 이 쌀을 많이 먹었어요. 사회에 나와서는 유엔에서 지원해준 '유엔 과자'라는 것도 본 적도 있어요. 이 과자가 엄청 맛있었어요. 당시 유엔에서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아동을 위해 과자를 지원했고 주민들을 위해서는 쌀을 지원해 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북한 당국이 유엔에서 지원해준 과자와 쌀이라고 주민들에게 말해줬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지원해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에 와서야 알았지 북한에 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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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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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힘이 있어야 받을 수 있어요. 일반 백성은 받기 힘들어요. 제 지인이 도 보위부 간부부장을 했어요. 그 간부부장의 엄마가 90이 넘었는데 그 아들이 검찰소에도 있고 보위부에도 있고 하니 생활이 괜찮았어요. 뭐가 모자랐겠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를 혼자 사는 것으로 처리해서 유니세프 쌀을 받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걸 공급해 주는 사람은 그 집에 유니세프 쌀을 공급해 줌으로써 그 집 간부에게 칭찬을 받게 돼요. 그리고 어쨌든 나이 든 사람에게 공급되는 것이니까 위에서 사진도 찍어가죠. 그렇게 되니까 백성은 그런 것을 못 타 먹어요. 그러니까 실제 삶이 곤란한 집은 그런 것을 받을 수 없는 거죠. 2016년도까지도 유니세프에서 들어오는 게 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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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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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식량 지원을 하면, 아무리 그 쌀을 간부들이 다 먹는다고 해도, 간부들도 자기네들이 먹다 남은 나머지는 또 팔지 않겠어요? 그러면 싸게라도 일반 사람들이 살 수 있어요. 돈 주고 사 먹는 쌀이라고는 해도 싸게라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북한에다가 쌀을 지원하고 뭔가를 지원하고 그런 것은 진짜 고맙게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해요. 제 자식이 북한에 있고, 제 형제가 북한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간부들이 1kg 지원해줬다고 해서 3, 4kg을 떼먹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분량은 제한되어 있으니까요. 간부들은 그렇게 지원받은 것은 배급으로 받으면 남은 것은 또 팔아요. 장마당에 지원해 준 쌀이 풀리면 가격이 많이 떨어져요. 싸게 떨어지면 사 먹는 사람도 좋아요. 저는 여기에 대해서는 진짜 고맙게 생각하고 동의해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쌀 1kg이라도 싸게 사 먹는 게 저에게는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저는 진짜 식량 지원에는 동의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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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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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쌀을 먹어요. 잘사는 집은 백미를 먹고, 어떤 집은 옥수수만 먹고 그러죠. 김치는 우선적으로, 제일 싸면서도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고 없어서는 안 될 반찬이에요. 그리고 국이 우선적으로 있어요. 이제 좀 못 사는 집은 국에다가 김치에다가 장에 고추나 오이 같은 거 찍어 먹고 그래요. 중간 계층은 두부라든가 인조고기를 같이 먹고요. 인조고기가 제일 서민음식이에요. 인조고기는 잘 사는 집도 자주 먹어요. 그리고 여름때는 채소가 싸니까, 오이김치도 해 놓고 양배추 같은 경우는 여름에 집집마다 30~100kg씩 사서 소금에다가 절여요. 그래야 온 겨우내, 다음 해 양배추 철까지 밑반찬을 떨구지 않거든요. 그리고 오이 철에는 오이를 절이고, 미나리를 절이고, 풋고추도 절여서 겨우내 먹을 것을 저장해요. 오직 염하는 방식밖에 없어요. 잘 사는 사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이렇게 다 해요. 어쨌든 밥을 먹자니까 국이 있어야 하고 반찬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것은 먹고 살아요. 점심 같은 경우에는 주로 면을 먹어요. 왜냐하면 면이 또 싸요. 옥수수면이에요. 그렇게 보통 면으로 점심을 먹고 저녁에도 면을 먹거나 그러죠. 그런데 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 먹는 사람은 볼 수 없었어요.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코로나19여서 농촌에는 죽을 먹으면서 생활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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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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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같은 것은 잘 못 먹어요. 한국에서는 삼겹살, 오겹살, 갈비살 다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한국에 오고 나서야 돼지고기에 삼겹살, 오겹살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북한에서는 그저 돼지고기라 하면 앞다리, 뒷다리, 대가리, 갈비 그런 식으로만 알아요. 돼지고기를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1kg만 해도 너무 비싸니까 명절에나 먹어요.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명절에 돼지고기 500g정도 사가곤 해요. 없는 사람이라면 그 마저도 못 사요. 닭도 키워요. 그런데 닭 키우는 사람은 소토지를 못하는, 나이 있거나 먼 길을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집에서 돼지, 닭 등 가축을 키워요. 그 닭을 키워서 자기가 잡아먹지는 않아요. 키워서 팔면 쌀을 더 많이 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닭 1마리 먹는 것 보다 쌀 10kg 먹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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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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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고 나서 “북한에 쌀이 없다는 게 사실이냐?”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여기(한국) 사람은 그것을 믿지 않더라고요. 멀리도 아니고, 제 시집이 살던 동네에, 그런 집들은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어요. 그 곳은 한 끼 먹는 게 대다수라고 생각하면 돼요. 한국은 밥 안 먹는 게 추세인데 북한은 하루 세 끼를 먹기는 하지만 칼로리가 없어요. 기름도 잘 못 먹고, 고기도 못 먹고, 된장도 잘 사는 집이나 먹을 수 있고, 소금에다 밥 먹고 그러니까 온 몸이 약하고 그래요. 못사는 집들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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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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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을 때도 북한에서는 6달 농사 지으면 최고 4달이나 먹을 수 있을까 한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막아 놓은 상황이고 농사 짓는 것도 땅이 좋지 못하니까 퇴비를 많이 해야 하고 중국에서도 비료를 많이 수입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지금 비료 수입 못하면 아마 수확도 적게 나올 것이에요. 그리고 저는 연선에 있었는데 중국 옥수수 종자를 가지고 농사를 지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중국 종자도 못 받고 그럴 거니까 북한 농사는 참…. 농장원들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고리대를 이용해 살아야 했어요. 겨울에는 어디에서도 먹을 게 없죠. 그래서 겨울에는 나무를 해요. 한 입방에 얼마씩 규정된 게 있는데 옥수수 쌀은 6kg, 감자는 30kg 이런 식이에요. 산에서 나물을 캐서 식량으로 바꾸기도 해요. 새벽 한두 시에 산에 가서 도벌하고 그러죠. 나무로 식량을 바꾸고 그러니까 마을에서 20~30리씩 들어 가야 나무가 있는 상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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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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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시기때는 갑자기 그렇게 위기가 닥쳐서 사람들이 어떻게 위기를 이겨내야 할 지 몰랐어요. 예전 고난의 행군 시기때는 역전에서 사람이 죽어 있어서 파리가 주변을 막 날라 다니고 그런 것을 전 여러 번 봤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도 살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어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는 사람들이 장사라는 것을 몰랐어요. 국가에서 배급을 줬고 그것으로 먹고 살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눈이 트였다고 보면 돼요. 지금은 개인들이 장마당에서 상점을 하나 운영한다든가, 개인이 돈을 투자해서 아파트를 하나 짓는다든가 그런 것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 전에는 이런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얼마 전(2021년 4월)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 시기만큼 힘들다고 선포는 했을 지 몰라도 지금 상태에서는 아직은 그 정도로 먹고 사는 게 힘든 건 아니라고 봐요. 저는 가족이 북한에 있어요. 가끔 통화할 때 어렵다는 말 한마디 정도만 하고 말지, 굶어 죽었거나 이런 소리는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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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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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존여비 사상을 따르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남자가 집에 들어오면 대장이었죠. 북한에서는 집에서 밥을 먹으면 남자가 설거지를 한다는 것은 지금도 상상하지 못해요. 여자가 상 딱 차려서 주면 남자는 먹으면 그만이죠. 여자가 다 치우고 그렇게 해요. 그런데 최근에 여자가 장마당에 나가서 돈을 벌면서 먹고 살고 여자 손으로 집안의 운명이 결정되니까 자연적으로 남자들이 여자한테 굽조리고 순응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여자가 큰소리 좀 쳐요. 이제는 경제력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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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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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여자들이 몽땅 장마당에 나가서 돈을 벌어요. 남자들이 돈을 버는 경우는 드물어요. 여자들이 벌어먹고 살다 보니 여자들의 힘이 세졌어요. 여자들이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와중에 국가에서는 여맹을 통해 여자들을 동원해 나라일을 시켜요. 생계도 유지하면서 동원도 나가야 하죠. 남자들도 동원되기는 하지만 여맹 조직이 일을 잘 하기도 하고 동원하기 수월하다 보니 여자들이 더 많이 동원돼요. 여자들은 하루하루 벌어서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시도때도 없이 동원하면 돈을 못 벌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게 정말 힘들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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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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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쨌든 어느 직장이든 다 다녀야 해요. 간호원은 그래도 다른 직업보다 조금 수월하니까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니면 다른 곳보다는 편해서 다녀요. 하지만 결혼하면 여자의 경우 굳이 직장을 안 다녀도 ‘여맹’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양으로 살아도 돼요. 그러니까 집에서 여맹 생활만 해도 되는 거죠. 제 주변에는 결혼하고 나서 간호원을 계속 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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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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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고위 간부가 되고 싶으면 될 수 있어요. 여자가 대의원도 되어서 들어가는데요. 여자 간부가 많아요. 농촌의 관리원장도 여자들이 많고, 그 다음에 경공업부문 지배인도 여자들이 많아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여자가 있어요. 지금 북한에서는 여자들을 간부로 많이 써요. 만약 여자가 지도자 될 자격이 있으면 당연히 지도자를 할 수 있어요. 북한에서는 ‘너는 여자니까 이런 직책 못 가진다’ 이런 문화가 없어요. 나라에서는 여자들 많이 쓰거든요. 자기가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요. 만약 김여정이 지도자가 된다고 하면 될 수 있다고 봐요. 김여정도 백두산 혈통, 백두혈통이라고 하잖아요? 북한에서는 백두혈통이 최고예요. 여자하고는 상관없어요. 북한에서는 여자라서 못하고, 남자라서 할 수 있고 그런 것은 없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혁명의 한 쪽 수레바퀴는 여자들이 밀고 나가야 한다고요. 북한에서는 여자들을 많이 내세워요. 남녀가 평등하게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맞아요. 그래도 국가적으로 일을 시키면 여자 할 일, 남자 할 일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여자가 힘든 일 하겠어요? 체력적으로 힘든 일은 남자가, 덜 힘든 일은 여자가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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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김정숙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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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고 해서 앞에서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어요. 저보다 높은 상관이면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어요. 무시는 대놓고 하지 못하죠. 그런 경우에는 성별에 따른 차별을 하지는 않아요. 남성 간부들이 많기는 하지만 간부 등용이라든가 그런 점에 있어서 여성들도 많이 채용되고 있어요. 여자라서 무시하고 그런 것은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앞에서는 그런 것은 없어요. 뒤에서는 뭔 소리를 못 하겠냐만은요. 저도 부대에서 여성 상관이 많이 있었는데 생활하면서 허물없이 대할 경우도 있지만 실제 사업상이라든가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를 할 수가 없어요. 이런 것은 개인의 품성이나 교양에 따라서 다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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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라선특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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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서 일을 하지 않는 여자는 자동적으로 ‘여맹’에 가입되며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여맹원으로 활동해야 해요. 저도 직업이 없었기에 탈북 직전까지 여맹 생활을 했어요. 여맹 생활이 직장 생활보다 더 힘들어요. 여맹원들은 매일 불려 나가 사상 학습과 생활총화 를 해야 해요. 여유 시간에는 건설, 도로정비, 마을 주변 정리 등 다양한 작업에 동원되곤 했어요. 틈을 주면 사상이 변질되고 딴 생각을 하게 된다며 잠시라도 가만 두지 않았죠. 집안일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면 책임자로부터 압박을 받기에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무조건 할 수밖에 없었어요. 돈은 하나도 주지 않고 매일 불러 내다보니 ‘365일 돌격대’라고 비꼬면서 말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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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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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적으로 접근해도 거부하거나 안 해요. 어쨌든 법기관 사람들은 힘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게 인권 유린을 당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런 걸 모르고, 싫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관계로 어쨌든 그 사람들에게 봉사하면 혹시 나중에 장사하다가 단속되던가 하면 막아주거나 하는 그런 ‘빽’이 생긴다고 생각하니까 싫어도 하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북한이 외형상 사회주의이고 아주 건전한 것 같지만 거기가 더 썩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여기(한국) 오니까 성폭력, 아동학대, 언어폭력, 뭐 엄청 많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은 그런 게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에요. 이게 성폭력인지, 성희롱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으니까 자기가 그런 유린을 당해도 모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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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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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매일 일어난다고 보면 돼요. 술 마시고 막사는 애들이 너무 많아요. 폭력이 엄청 많아요. 아내 때리고 이런 것은 그냥 일상이에요. 제가 볼 때 10 명 중 4, 5명은 자기 아내를 때리면서 살아요. 폭력이나 그런 건 너무 시시한 일이다 보니 신고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폭력이 너무 일상화되다 보니 그래요. 저는 여자가 아니라서 여자 입장은 잘 모르겠어요. 신고도 하고 이혼도 하고 다양하게 해결하려고 하기는 하는데 어차피 해결이 안 돼요. 가장 좋은 해결이 이혼이긴 한데 보통 ‘그 남자가 그 남자겠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꾹 참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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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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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있어요. 우리 심정을 말하면, 하여튼, 인신매매든 어쨌든 그저 그 땅(북한)을 떠나고 싶어 해요. 그렇게 해서라도 나오고 싶어하죠. 그만큼 살기 힘들어요. ‘아무리 팔려가도 여기(북한)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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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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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가 공짜로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해 줬어요. 하지만 실상 공짜는 아니고 인신매매 형태로 절 중국으로 넘긴 것이죠. 브로커들은 절 중국 남자에게 팔면 어차피 돈을 받으니까 속인 것이에요. 브로커는 조선족이 아닌 한족으로 보였어요. 브로커는 서투른 조선말로 저에게 제가 시집을 갈 거라고 했어요. 팔려 간다는 것이, 그리고 19살에 시집 간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거였어요. 중국에 도착한 후 어느 집에 들어가자 그때 브로커가 저에게 제가 팔려간다고 말해줬어요. 그제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고 너무 어이가 없었어요. 팔려가는 것은 진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 북한으로 들어가면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고 제 앞날을 망치게 되는 것이었죠. 저는 집 안에 갇혀 있었어요. 그리고 탈출한다고 해도 어차피 중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돌아다닐 경우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들통날 것이 분명했어요. 중국 공안에게 붙잡히면 저는 북송될 것이고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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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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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간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숨길 수 있을 거잖아요? 하지만 보위부는 중국에 잡힌 여자들 남편의 사진까지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다 알고 있어요. 중국 내에 보위부 일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있어서 자료들이 다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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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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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중국 공안에게 3번이나 잡혔어요. 생각해보면 공안에게 조사를 받을 때는 구타가 없었어요. 남자들 같은 경우는 맞기도 한다더군요. 그런데 (중국)변방대에서는 거기 군인인지 엄청 때렸어요. 여자들도 엄청 맞았지만 남자들 같은 경우는 형편없이 때렸어요. 보이는 부위는 때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다 인권이니까 보이지 않는 부위를 엄청 세게 때려요. 저도 변방대에서 조사받을 때 맞았어요. 맞아서 다리를 다쳐서 두 달 동안 제대로 걷지 못했죠. 북송되면 세관을 통해 들어와요. 모든 북송자는 보위부에서 먼저 조사해요. 한국 기도를 한 사람 같은 경우는 그저 3일 정도 조사받고 끝나요. 그 3일이란 게, 한국 기도가 완전하게 증명된 상태이기에 더 조사할 게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들은 관리소라는 곳으로 보내져요. 따로 재판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북한에 살 때는 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살던 사람이었어요. 제가 중국으로 나가고 나서도 제가 감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진짜 그런 감옥에 들어가보고 나니까 살아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더라고요. ‘아, 우리나라(북한)도 이런 지옥 같은 곳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저는 감옥을 갔다 온 사람들을 볼 때면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봤어요. 그 사람들은 다 엄청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인 줄 알았죠. 하지만 제가 직접 감옥을 가 보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어요. 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죄 아닌 죄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어요. 북한 감옥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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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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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을 때, 제가 2019년 나올 때 전까지도 처형이 있었어요. 첫 번 째는 회령에 있는 여자들이었는데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잡혀서 청진에서 총살을 했어요. 직접 목격했어요. 쉰 여섯인가 여덟 살 먹은 여자가 그걸 주동했다고 들었어요. 자기 집안에서 가만히 숨어서 애들이 종교를 믿게 한 것이죠.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수성천에서 총살했어요. 북한은 종교에 대한 것은 아주 강력해요. 제가 만약 중국에 넘어가서 조금 살다 왔다고 하면 제일 먼저 따지는 게 거기서 종교를 접한 적 있는지예요. 목사를 만났는지, 선교사를 만났는지에 대해 강력하게 따지죠. 이 사람들이 믿은 종교는 기독교예요. 북한은 기독교라고 하면 두 말없이 완전히 반국가적, 반당적, 반혁명적으로 강력하게 처벌해요. 종교를 만났다고 하면, 한국에서 종교를 통해 국정원과 접촉한 것이 있다고 봐요. 북한에서는 국정원이 목사, 선교사 등을 통해서 반정부적, 반국가적인 그런 공작을 많이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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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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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너무 엄격히 통제하니까, 종교 전파는 못하고 혹시 가정적으로, 옛날부터, 할아버지대부터 교육받아 온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있다고 봐요. 많이 있거나 그렇게는 못 돼요. 왜, 그건 들키면 자기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멸살되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하고파도 못 해요. 종교 집단이 북한에 있다 그런 말은 극소수적으로, 한 두 개 가정에서만 있는 정도일 것이고 많을 수 없어요. 극히 일부적으로 있을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종교 모임을 가질 정도는 못 되고 정말 있다고 해도 2, 3명 정도, 혹은 가정 안에서 극소수로 있을 뿐이라고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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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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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비밀스럽게 해요. 처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미신 행위를 하는 사람들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올까 봐 나라에서는 엄청 우려를 해요. 예를 들어, ‘김정은이 어떤 병을 앓는다’ 이런 말 같은, 정치적이라면 정치적인 말일 수 있는 그런 말들이죠. 그런데 보안서나 보위부 사람들도 비밀리에 점을 보러 많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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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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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보고 병신이라고 해요. 아무튼, 장애를 갖고 있으면 그 자식을 어디 지방에 보내야 해요. 제 친척의 동무도 아버지가 평양에 있었는데 병신 자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애를 보내는 게 가슴 아프니까 집안 모두가 같이 량강도로 내려왔더라고요. 보통 혼자 지방으로 보내요. 아니면 지방에 있는 친척집으로 보내든지요. 어쨌든 평양에는 못 살게 해요. 장애인은 자기가 스스로 벌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야 해요. 나라에서 지원 같은 거는 없어요. 그 집 식구가 벌어 먹여야 해요. 장애인이 집에 있으면 그 집 식구가 몽땅 망하는 거예요. 걔를 계속 돌보면서 있을 수 있겠어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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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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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창 난쟁이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난쟁이들은 씨, 종자를 못 퍼트리게 해요. 량강도에는 후창군 월탄이라는 곳에 난쟁이들을 다 모아 놨어요. 나라에서 강제로 그곳에 보내는 거죠. 그리고 다 불임 수술을 해버려요. 불임 수술을 정 안 하겠다고 하면 애를 낳지 못하게끔 강제해요. 애기를 가져도 없애라고 해요. 아무튼 낳지 못하게 하죠. 최근에도 있어요. 제가 나올 때도 있었어요. 계속 운영되고 있어요. 그저 난쟁이는 다 한 곳에 몰려 살게 하니까, 만약 시내에 살고 있다고 해도 챙피해서 못 살아요. 소문 나니까요. 집안에 난쟁이 한 명 있으면 그 집 식구는 시집, 장가 가기 힘들어요. 걔 땜에 그런 일을 당하니까 집에서는 매달 돈을 얼마씩 가져다 바치면서 걔를 난쟁이 골 안에 보내든지 해서 거기서 살게 만들어요. 나라에서도 따로 지내게 하지만 가족도 같이 살기 힘드니까 보내 버려요. 분주소나 동사무소에서 가서 말하든지… 아무튼 종자가 못 퍼지게끔 해요. 결혼 못하게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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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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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던 부대는 그렇지 않는데 다른 곳은 굶고 그래요. 영양실조 걸려서 집으로 돌아오는 애들도 많아요. 2018년때도 많았어요. 탈영하는 애들도 많았고요. 너무 배고프고 힘드니까 도망치고 그래요. 반찬 같은 것은 아예 허연 염장 무에 콩 반찬 이런 거 해서 먹어요. 부대가 있는 지역마다 다른데 강냉이밥을 먹거나 쌀밥을 먹곤 해요. 고기 같은 경우는 일반 부대는 한 달에 한 번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명절때나 먹는다고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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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무산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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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1년 중순 제대했어요. 김정일과 김정은이 바뀌기 직전에 군대를 제대한거죠. 저 까지만 하더라도 구타가 많았는데 그 후에 군대간 애들 중에서 병 만나서 제대된 애들 만나서 물어보면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말 하더라고요. 김정일 때 까지만 해도 구타가 좀 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처럼 군대 나가서 상급들에게 맞기도 하고 그래서 허리가 병신되고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김정은 때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어요. 이제는 상급들이 하급 병사들을 구타하고 그러면 어느 정도 처벌도 받고 심한 경우에는 군복 벗고 제대될 수도 있어요. 간부들보다도 같은 병사들 사이에서 위에 계급 병사가 밑 계급 병사를 때리고 그런 게 많이 있어요. 그런데 갈굼은 한국보다 아마 더 심할 것이에요. 많이 심해요. 저는 어쨌든 거의 100% 맞아서 병이 생겨서 집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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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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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 해요. 신고해도 아무 변화가 없어요. 신고는 여기처럼 전화로 하는 게 아니라 한국으로 치면 경찰서인 보안서로 직접 가서 해요. 북한은 집전화도 그렇고 손전화도 없는 사람도 많아요. 아무튼, 보안서 같은 경우에도 다 뇌물만 받아먹지 하는 것도 없어요. 방법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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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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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인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냐면, 만약 누군가 검사를 신소한다고 하면 그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게 있어요. 검사를 하자면 빽이 든든해야 하고 경제력이 받침되어야 하는데 그런 검사를 해임하자면 진짜 품이 많이 들 텐데 그냥 넘어가자는 식으로 되어 버리죠. 신고를 해도 그것을 감싸줘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첫째, 북한에서는 때린 놈을 나쁘다고 하지 않고 맞은 놈을 나쁘다고 해요. 꼭대기에서 밑에까지 취급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죠. ‘니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맞았겠지’ 이렇게 벌써 인식해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 때렸다고 하게 되면 폭행죄로 처리하기 때문에 법이 무서워서 때리지 않게 되는데 북한에서는 맞아도 신소를 하지도 않아요. 신소를 해도 해결이 안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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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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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다 말하는 게, 안전원보고는 자기 안전을 위해서 일하니까 안전원이고, 보위부 보고는 자기를 보위하는 보위원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그저 안전원이랑 보위지도원만 잘 살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뇌물을 찔러 바치면, 어느 정도 바치기만 하면 사건이 무마가 되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뇌물 받아먹어서 잘 살아요. 전부 그렇게 살죠. 북한은 중간 간부가 더 나빠요. 중간 간부들이 위에다가 헛보고를 하고 제대로 하지도 않고 중간에서 자기네들이 다 챙겨 먹고 그러거든요. 북한에서는 중앙당에서 조그마한 간부만 되더라도 다 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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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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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보긴 했으나 사람들이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요. 사람들이 알기는 알아요. 사람들 사이에서 ‘북한의 인권이 세계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아니다’라는 식의 소문이 돌곤 했어요. 그런 식으로 인권이라는 말을 들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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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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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아이들은 왕’이라는 말을 자랄 때부터 듣고 커요. 하지만 여기 한국에 와서 차를 타보고 나서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차를 타고 가는데 "여기는 어린이 보호 구간입니다. 속도를 낮추세요."라고 나오던데, 그거 보고 놀랐어요. 이거 완전히 북한하고 상반된다는 것을 알았죠. 북한은 말만 잘하지 그런 것이 없어요. 북한에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게, 전혀 그런 게 없어요. 여기 같이 건늠길(횡단보도)도 잘 없고, 아이들이 지나가도 차가 그냥 막 달리다가 방해되면 애들 보고 부모 데려오라고 하고 그렇게 해요. 어떨 때는 아이를 잡아서 차에 싣고 가기도 해요. 애 엄마 찾아가서 애 때문에 사고 날 뻔했다고 따지려고요. 아이들을 키우기에 정말 무서워요. 한국에 오고 나서야 ‘야, 이거 어처구니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북한에서는 학교에서 선생이 아이를 막 때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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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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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학교 안 나가고 돈 버는 애들이 유별나게 좀 많았어요. 보통 초급중학교까지는 학교를 거의 다 보내요. 하지만 고급중학교 올라가면 배울 것이 별로 없다거나 학교에서 일만 시킨다는 그런 생각을 해서 부모들이 애들을 학교에 잘 보내지 않아요. 한국에서는 졸업증 가지고 엄청 중요하게 보고 그러던데 북한은 졸업장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애들은 어머니가 장사하면 도와주던가 그러죠. 사실 노는 애들이 태반이에요. 심심풀이 식으로 애들끼리 놀이 겸 산에 올라가서 버섯 같은 거 따서 팔면서 용돈 벌기도 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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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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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옛날에 월사금을 냈다더니 세상에 우리는 지금 일사금을 내고 학교를 간다’고 말해요. 말이 무상교육이지, 제가 돈을 선생님에게 얼마만큼 내고 투자하냐에 따라 선생님이 우리 애를 신경 써서 배워주고 그래요. 달마다 학급반장, 분단반장이 돈을 딱 나눠서 ‘나는 선생님 땔감을 해결해 준다’, ‘나는 선생님 식량을 해결해 준다’, 그리고 ‘한 달에 선생님을 위해 옷을 얼마 사주자’ 이런 식으로 그 선생님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하니까 부모가 돈을 진짜 많이 벌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북한도 애를 안 낳아요. 나라에서는 교사라도 돈을 안 줘요. 한국처럼 월급을 준다고는 하는데 한 달에 사탕 한 알 가격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산다는 말인가요? 월급으로 빵 하나나 사려나요. 그래서 선생님들도 얼마나 자기가 자질이 있는가에 따라 돈이 많은 애들만 맡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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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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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나가면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대부분 일 했어요. 오후에도 2시간 공부하기는 하는데 2시간 공부 후에 나머지 2시간은 일을 했죠. 이런 건 일상생활이었어요. 농촌이다 보니 농촌동원 일 하거나 그랬죠. 가을걷이때는 감자를 캔다거나 강냉이 철에는 강냉이를 따게 했어요. 봄철에는 강냉이를 심어야 하다 보니 모내기 일손이 부족해서 모 나르는 것도 도와주고 그랬고요. 건설 같은 것은 고급중학교 학생이 되면 하긴 했어요. 초급중학교 다닐 때는 애들이 너무 여리여리 하다 보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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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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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서 범죄자를 하나 잡았는데 남조선 도주 범죄나 정치적 성격을 띄는 범죄가 아닌, 자기네 관할이 아닌 다른 일반 사건이면 검찰소에다가 넘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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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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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가 가택수색 해도 인민반장이 있어야 할 수 있어요. 물론, 어떤 경우인가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죠. 새벽에 보위부에서 들이닥치는 것과 같이 중대한 범죄와 관련 있는 경우에는 인민반장이 따라오거나 하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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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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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체제 자체가 서로를 감시하게 되어 있어요. 인구 세 명 중 한 명은 국가보위성 정보원으로 있다는 말도 있죠.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에요. 제가 왜 이에 대해 말했는가 하면 우리 아버지가 국가보위성의 정보원 역할을 하며 약 30년간 주변 사람들을 감시했었어요. 저는 30년동안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요. 이렇듯 북한에서는 누가 언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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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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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보안원은 담당 보안원대로 그렇게 사람을 묻어 놓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사람이란 게, 뭉치면 관리하거나 깨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북한은 그냥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려고 진짜 애를 쓰는 나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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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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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는 정치적 성격을 띤, 적선이나 수령님의 사상과 어긋나는 모든 것들, 예를 들어 수령이나 나라를 헐뜯거나, 반동일 등과 관련된 범죄를 다루고, 나머지는 안전부에서 다뤄요. 일반 사람들의 결함에 관한 것은 안전부에 말하지 보위부에는 잘 말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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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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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반장은 보안서, 보위부로부터 다 지시를 받아서 사람들을 감시해요. 인민반장 자체가 보위부 끄나풀이나 마찬가지이죠. 그리고,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라고, 여기서 이 말 하면 저기서 다 알게 되니까 비밀이 들통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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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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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비판한다는 것에 대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비판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판이란 것이 실제로 상대방이 잘못 해서 비판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억지로라도 비판을 해야 하죠. “비판 없는 생활총화는 하지 마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비판할 게 없을 경우 생활총화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닌, 서로를 비판할 때까지 생활총화를 끝내지 말라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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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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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항상 인민반장, 통보원 감시 속에 있어요. 감시체계가 다 있죠. 그런 감시망이란 게 있고, 또 거기에 다른 사람들 모르게 감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감시망도, 공개된 감시가 있고 보위부나 그런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는 감시가 있고요. 사람들 사이에 스파이를 박아 놓아요. 누가 감시하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잘못 말 했다가는… 어딜 가서라도 아무도 믿지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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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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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들에게는 권리, 권한이 없어요. 오직 수령 숭배, 오직 3대 수령만 떠받들어야 하죠. 북한에서는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같은 인권이 단 하나도 없어요. 말 함부로 잘못 했다가 신고 당하면 보위부에 잡혀 들어가요. 그래서 북한에서는 말 한마디, 그저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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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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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는 살인도 많아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도 주변에서 한 몇 건 있었어요. 그런데 살인은 TV에 나오지 않아요. 단 한 번도 TV에 어디에서 무슨 사건이 있었다고 나온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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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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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상무'라는 단속단이 있는데 그 사람들한테 걸리면 교화소에 수감될 수도 있어요. 제 가족도 교화소에 갇혔어요. 액정 TV에 USB 꽂고 다른 나라 노래 나오는 것을 들었다가 잡혀서 교화소 가야 했죠. 불순 녹화물에 대해서는 아주 엄하게 단속해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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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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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부터는 상황이 많이 심각해졌다고 들었어요. 조금만 봐도 무조건 15년 형이라고 하더라고요. 법이 완전히 강화되었어요. 그 전에는 뇌물을 고이면 조금 괜찮아졌지만, 지금은 뇌물을 고이면 뇌물을 받은 사람이 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단속하는 사람도 무서워서 한국 것을 본 사람을 봐주거나 그러지 못 해요. 단속과 처벌이 더 심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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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삼지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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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있을 때는 제가 듣고 있던 노래가 한국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한국에 와서야 한국 노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중국 연변 지역의 가수들이 한국 노래와 비슷한 스타일로 노래를 불러서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이 만든 노래인 줄 알았어요. 보통 USB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알아요. 장마당에서 USB를 구할 수 있는데 파는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사야 해요. USB뿐만 아니라 SD카드로도 많이 유통돼요. 과거에는 DVD로 많이 보긴 했는데 요즘에는 거의 USB나 SD카드를 써요.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다 보니 큰 TV보다는 배터리로 돌아가는 노트텔로 자주 봐요. 한국 드라마나 허가 받지 않은 외국 영화를 보다가 걸리면 큰일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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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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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을 거예요. 옛날에는 있었어요. 회령 쪽은 아예 안됐어요. 그런데 개성 쪽은 그래도 한국이랑 좀 가까워서 한 5년 전(2016년쯤)까지만 해도 잘만 조절하면 라디오가 잡힌다고 들었어요. 개성에 살던 지인이 말해줬죠. 그런데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알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더 차단이 강화되었어요. 북한 사람들은 못 듣는 거죠. 괜한 수고예요. 다 차단되었거든요. 왜냐하면, 지금은 기술이 너무 빨라요. 탐지기 같은 경우는 북한이 아마 세계 1위일 것이에요. 전파 탐지 기계가 너무 좋아요. 그런 상황인데 라디오 전파가 그대로 갈 수는 없어요. 외부 라디오 방송을 못 들으니까 듣는 사람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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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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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옷차림을 많이 단속해요. 그런데 옷차림 단속을 당하지 않기 위해 거기 맞춰 입어도 일하는 시간에 밖에 다니면 걸릴 수밖에 없어요. 보통 그런 걸 단속하는 사람들은 청년동맹이에요. 이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니면서 계속 단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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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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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전단을 날리는 것은 사실 큰 효과는 없어요. 북한은 우선 전단지를 못 보게 강력하게 통제해요. 보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을 내리죠. 북한의 여러가지 규제 및 통제 조치로 인해 대북전단이 큰 효과는 못 보겠지만, 그래도 일부적으로는 크지 않게 나마 영향은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정은 일가나 사회주의에 대해 폭로한다는 그런 전단 내용을 처음 보면 사실 믿기 힘들 것이에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줍다 보면 100% 거짓말이라고 넘기기도 힘들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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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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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그런 어플을 써 본적 있어요. 어플 이름은 ‘나의 길동무’예요. 버전이 계속 업그레이드돼요. 이 어플을 열어보니 거기에 각종 도서가 엄청 많았어요. 이 도서는 북한 도서가 많고 외국 소설, 명작 같은 거도 많았어요. 미국 소설도 있어요. 드라마나 영화는 미국 것을 보면 바로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소설은 볼 수 있어요. 실제 책으로도 그런 것은 볼 수 있고요. 그런 명작을 도서로 보는 것은 큰 문제없어요. 사회를 비판하는 그런 책도 많이 있지 않나요? 그런 것도 정부에서는 보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와 관련된 책도 많아요.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 그런 것은 절대 못 보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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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200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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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북한에는 TV 중계되는 방송이 조선중앙TV 딱 하나인데 와이파이 모양처럼 생긴 안테나? 기계? 그런 것을 집에 설치하면 4개를 볼 수 있어요. ‘만수대’ 통로(채널)라든지 그런 것을 통해 방송을 볼 수 있고 그랬어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우리 집도 그걸 놓고 봤어요. 아까 말한 기계를 설치하면 4개의 채널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에요. 스포츠 같은 게 계속 나오는 통로도 따로 있어요. 스포츠의 경우 세계적으로 하는 것도 가끔 거기서 나와요. 그게 이름이 다 있어요. ‘아리랑’, ‘평양’ 이런 식으로 이름이 있더라고요. 중국에서 들어오는 방송도 있고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그래요. 원래 대부분의 집들은 다 1개의 채널만 봤어요. 하지만 갑자기 그 기계가 나오면서 4개의 채널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런 채널들은 국가에서 다 편집을 한 것 같았어요. 일단은 재난, 재해 이런 것도 많이 나와요. 세계에서 발생하는 큰물 피해 이런 것도 막 나오고요. 올림픽이나 이런 것도 중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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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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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것만 볼 수 있어요. 길 다니다 보면 CD 판매소가 있어요. 거기에는 CD를 쫙 매달아 놨는데 제목도 다 써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서서 뭐가 있는지 많이 구경하죠. 애니메이션도 있고 중국 드라마, 영화 그런 것도 있어요. 한국 것과 미국 것 빼고는 다 있어요. 이런 것은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중국 것 중에도 보면 안되는게 있어요. USB나 CD를 꽂았을 때 화면 왼쪽 위에 ‘목란’이 떠 있으면 봐도 되는 것들이죠. 그렇게 판매되는 CD는 나라에서 검열을 받은 것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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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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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망'이라고 되어 있는 게 있기는 있는데, 그건 그저 학습 같은 그런 거를 위한 거예요. 망 형태로는 되어 있지만 철저하게 보면 망은 아니고 선전을 위한 수단일 뿐이죠. 인터넷 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있으면 안되니까요. 있으면 서로 결탁할 수 있으니까 그래요. 그걸 분쇄하고 끊어 놓기 위한 것이 북한의 전략인데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 끊어 놓는 게 북한의 전략이에요. 인터넷이 들어가기만 하면 달라지겠지만, 절대 들어갈 일은 없어요. 인터넷을 막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에요. 그걸 허용하면 자기네들이 망할 거란 것을 북한 정부도 알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아마 콧방귀 끼면서 이 외부 세계를 ‘이렇게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것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놈들이지 않은가?’하고 콧방귀 낄 것이죠. 절대 허용 안 해요. 그게 자기네들의 생명과도 같으니까요. 첫째가 인터넷을 못하게 하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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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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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손전화(휴대전화)를 썼어요. 하지만 그저 통화하거나 노래를 몇 가지 듣는데 쓰곤 했어요. 북한에서 생산하거나 수입하는 손전화는 나라에서 먼저 특정 앱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뒤 시장에 풀어요. 딱 쓸 수 있는 앱만 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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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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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도청을 세게 해요. 독일에서 장비를 들여오고 해서 전화를 1분 이상 하면 진짜 도청에 걸려요. 근데, 북한은 도청을 통해서 누군가가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채도 그걸 사전에 막지 않아요. 그 사람이 탈북하기 위해 강에 딱 들어설 때, 모든 범죄가 그때 성립되니까, 그 강을 어느 정도 건너갔을 때 바로 덮치는 것이죠. 잠복했다가 가는 것 다 보면서 기다렸다가 잡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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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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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변 사람들도 한국에 전화할 일 있으면 중국으로 넘어가서 전화했어요. 북한 안에서는 접경 지역에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거의 한 적이 없어요. 과거에는 브로커들이 중국과 가까운 접경 지역에서 중국 휴대전화를 이용해 한국으로 전화하는 것을 도와줬어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북한 사람이 한국으로 연락하기가 전보다 힘들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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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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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새로운 도청 기계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아무리 중국과 가까운 접경 지역이라도 북한에서 한국으로 전화하면 이제는 거의 다 도청당한다고 보면 돼요. 불과 몇 년 사이에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한국으로 연락하던 사람들이 많이 잡혔어요. 얼마 전까진 한국과 통화 시 1분이 넘으면 걸린다고 해서 통화할 때 몇 마디 하고 끊고 다시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휴대전화 전원을 켜거나 한국으로 발신 신호만 가도 도청 기계가 다 잡아낸다고 해요. 전화로 대화한 내용이 그대로 다 저장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 번이라도 잘못 걸리면 인생 종 치는 거죠. 교화소나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갈 정도로 심각해요. 이를 무마하려면 법 기관에 많은 돈을 써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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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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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집회는 조직적으로 하는 것이에요. 무조건 가야해요. 안 갈 경우 돈을 내야 하죠. 보통 자기가 속한 조직에 내야 했어요. 자기가 원해서 참석하는 것이 아닌 강압적으로 동원해요. 물론 사람들은 잘 안 가려고 해요. 김일성 생일, 김정일 생일 같은 경우에는 그 기간에 행사가 엄청 많아요. 벌어먹고 살기도 너무 힘든데 계속 그런 행사에 참석해야 하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이란 것이 말이 아닐 정도예요. 배급도 제대로 안 주면서 밤낮으로 사람들을 계속 ‘여기로 가라, 저리고 가라’ 해요. 김정은이 정치를 하면서 얼마나 강력하게 하는지… 사람들이 정말 말도 못 해요. 말 조금 잘못 했다가 보위부에 잡혀갔다가 며칠 시달리다 나오면 사람이 머저리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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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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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시위 자체가 없어요. 자신의 의견을 표현만 해도 잡혀가는 나라가 북한이에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의견을 표현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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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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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라도 하려고 하면 그래도 다른 사람이랑 어떻게 하자는 식으로 말하면서 조직이 모이고 그래야 하는데 서로 믿지 못하고 누가 스파이인지 알지 못하니까 할 수가 없어요. 감히 그런 생각을 하려고 하지도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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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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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쪽지를 줘요. 그걸 그냥 함에 넣으면 돼요. 사람들은 용지를 보지도 않아요. 그냥 그걸 받은 후 함에 넣고 와요. 도, 군에서 꼭 필요한 후보 이름을 찍어 알려줘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무조건 투표해야 하죠. 만약 자기가 그 사람을 찬성하지 않는다고 하면 곱하기 표(X표)를 해서 가져다 넣으면 되긴 하는데 누가 그걸 하지는 않아요. 만약 제가 그 사람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저를 잡아가요. 그러니까 무조건 갖다 넣는 것이에요. 강압적인 것이죠. 후보가 한 사람밖에 없기에 그냥 무조건 넣어야 해요. 후보가 누군지도 몰라요. 선거날이라고 하면 누가 대의원이 되든 그런 것에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거기 가서 투표하고 와야 하기 때문에 해요. 응당 해오던 사람이 계속 하는데 그거에 누가 관심을 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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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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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9년에 한국으로 오기 전 3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그리고 7월에 지방주권 대의원 선거(도·시·군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를 하고 왔어요. 우리가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할 때는 도당비서 사진과 신상, 경력이 나온 것을 써 붙여요. 그냥 ‘이 사람이다’ 이런 식이죠. 무조건 그 사람을 뽑아야 하지만 선거해라 이런 것이에요. 뽑으라는 게 없어요. 위에서 그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후보라는 것도 없어요. 그 다음에 도 대의원 있고, 시 대의원 있는데, 또 우리 구역의 3개 동에서 ‘어느 대의원이다’, 또 어느 2~3개 동에서 ‘어느 대의원이다’ 이렇게 각 대의원마다 사진과 개인 이력을 써 붙여 놔요. 일반 사람들은 그저 선거날에 ‘아, 이 사람이 대의원이구나’라고 아는 게 다일 뿐 누굴 선택해서 뽑는다는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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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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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안에서는 북한이 망한다고 보는 사람이 없어요. 교육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는 망하는 게 아니라 곤란할 뿐이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장군님 따라가는 길에 고난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고난의 길을 넘으면 행복한 순간이 온다’고 믿는 거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해 보세요. 날마다 그런 노래를 불러 주고 부르게 해요. 그러면 세뇌 안되겠어요? 당연히 세뇌되죠. 물론 걔 중에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걸 믿는 사람이 더 많아요. 전반적으로 보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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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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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사회과목이 큰 부분을 차지해요. 방학기간이 되면 제가 실무적인 공부를 하기 보다는 ‘위대한수령김일성동지혁명활동연구’와 같은 사회과목 조사 활동을 해야 해요. 북한은 대학 다니면 여름에 보름, 겨울에는 20일 밖에 방학이 안 돼요. 그런데 방학 기간에도 그런 공부를 해야 해요.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방학 기간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대학에서 사회과목이 30~40%라고 보면 돼요. 김일성 혁명활동, 김정일, 김정숙, 현행 당 정책 등등을 배워야 하죠. 제가 배울 때도 그랬으니 지금은 아마 더 많을 것이에요. 전공 과목만 배우는 게 아니라 이런 사회과목도 공부해야 해요. 전체 성적이 동점일 경우 사회 과목 점수가 더 높은 학생이 우선시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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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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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9년 당시 남북이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은 ‘와~! 미국 대통령 만난다’, ‘한국 대통령 만난다’ 하면서 기대하며 통일이 바로 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만나고 오고 난 후 각 조직별로 강연을 했어요. 강연에서는 미국과 한국을 절대 믿으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미국 놈은 교활하고, 일본 놈도 교활하고, 남조선도 같다며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회라고, 믿을 것 못 된다며 우리는 자력갱생으로, 우리 힘만 믿고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김정은이 그렇게 만나고 와도 뒤에서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사상교화 사업을 해요. 여맹, 사로청(청년동맹), 직맹, 당, 그저 조직별로 위에서 지도가 내려와요. 그런 식으로 교육을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절대 머리가 다른 곳으로 돌아 못 가게끔 계속 세뇌 교육을 시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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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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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봤다는 것이 걸리면 저 혼자 보안서 가서 조사받고 매 맞고 만약에 돈이 없으면 교화소 가고 그러겠지만, 그리고 엔간해서는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김정은에 대한 말을 잘못하면 저뿐 아니라 온 가족이 정치범수용소에 다 들어가요. ‘너 자식 교육 잘못 했으니까 다 들어가서 죽어라’ 이런 식으로 다 들어가는 거죠. 그게 너무너무, 엄청나게 큰 죄예요. 그러니까 우리 앞 대부터 그렇게 교육받아서 아무리 가까운 친구래도 말 안 해요. 가족끼리라도 돌려서 말해야지 직접적으로 당이나 김정은에 관해 말하면 안 돼요. 이것은 응당 그렇게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 인식이 이거는 할 수 있는 소리 못 할 소리 자연스럽게 구분이 되는 것이죠. 김정은에 대한 말은 아예 하지도 않고 입 밖에 꺼낼 생각조차 하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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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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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은 외국에 나갈 수 없어요. 돈을 써도 못 나가요. 오로지 나라에서 허가를 내줘야만 나갈 수 있죠. 보통 북한에서 일반 사람이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소련 벌목공, 중국 식당 종업원과 같이 나라의 외화벌이를 위한 것이 전부예요. 북한이 변하려면 사람들을 풀어주고 외부에 개방하거나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외국과의 왕래를 해줘야 하는데 위에서 그렇게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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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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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오다가 북송당해서 관리소 간 사람이 있어요. 2019년도였어요. 혜산쪽이었죠. 그 사람은 요덕 관리소로 보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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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신포시
- 남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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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국경을 다 봉쇄했어요. 국경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밀수를 하면서 먹고 살았는데 국경 봉쇄로 인해 그걸 못하게 되었어요. 돈 벌이가 끊긴 것이죠. 국내에서 생산하는 게 적은 상황에서 물가가 확 오르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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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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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김정은도 그렇고 처벌을 강하게 내리다 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아요. 예전에 중국을 자주 왔다 갔다 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국경 근처에만 가도 심장이 뛰어 접근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예요. 2017, 2018년도만 하더라도 ‘발견하면 총 쏴라’, ‘서라 세 번 해서 멈추지 않으면 쏴라’라는 말이 돌곤 했어요. 국경 지역 물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웬만한 배짱 없이 국경 지역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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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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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밀수 같은 경우에는 큰 상점이라던가 백화점 같은 곳에서 보안서, 보위부, 검찰소에서 담당하는 사람이 한 명씩 나와서 북·중 국경에서 국가적으로 밀수를 했어요. 혜산시에서는 보위부, 세관, 검찰소 검사도 붙었던가… 아무튼 그 사람들이 밀수 현장으로 와서 밀수 현장을 주시해요. 국경 근처 밀수 현장으로 밀수하는 중국 사람, 대방들이 넘어오면 북한 측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은 다음 뒷짐, 즉, 물건을 서로 교환하게 되는데 이때 보위부 등 국가에서 감시하러 나온 사람들이 무슨 물건을 주고받는가를 감시해요. 여기서 국가밀수로 물건을 주고받는 북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에요. 기관, 기업소 등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죠. 백화점, 상점 같은, 한국으로 치면 큰 마트가 북한에도 있어요. 여기서 국가밀수를 하는 것이죠. 주로 개인 집에서 사용하는 가스통부터 전기선, 용접봉, 못 같은 각종 자재 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확인한 것만 말하자면 북한에 전기가 잘 안 오니까 건전지가 많았어요. 그게 소비가 제일 빨라요. 그러니까 배터리 같은 거를 많이 들여왔어요. 대북제재 이후에도 계속 수입했어요. 정확한 양까지는 잘 모르지만, 대형 화물차, 북한에서는 추레라라고 하는데 그런 차로 한 10~13대 분량으로 왔다 갔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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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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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리 철저하게 단속한다고 해도 밀수가 있었어요. 물론, 지금은 그 전처럼 밀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아요. 지금 아무리 코로나19가 왕성해도 밀수는 계속 돼요. 코로나19 이전에는 하루에 4번 밀수가 이뤄졌다면 지금은 1번 밖에 못 한다고 보면 되는 거죠. 물가가 최소 2배 이상 올랐어요. 밀수를 하기 힘든 조건에서 밀수꾼들이 물품을 넘겨 오기 때문에 그 값이 올라가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완전히 막혀서 물건이 중국 쪽에서 못 넘어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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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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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중 한 명이 평성에 사는데 생일이라 갔어요. 갈 때는 써비차를 탔는데 중국 돈으로 150 위안을 줬어요. 큰 돈이죠. 평성에 갈 때도 여행증명서를 받아야 해요. 가는 길 마다 초소가 다 있기 때문에 검사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여행증명서를 떼자고 하면 못 떼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그래서 뇌물 주고서 증명서를 떼요. 여행증명서에는 기간이 있어요. 증명서는 시 안전부에서 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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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북도 금천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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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자체가 없어요. 기름도 없는데요… 나라에는 그런 것을 운영할 돈이 없다 보니 한국처럼 준공영이나 공영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유튜브 같은 곳에서 혜산 시내를 몰래 찍은 비디오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버스나 차는 모두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에요. 돈 있는 사람들이 차를 밀수로 들여와서 해요. 문서상으로는 무슨 사업소 소속으로 되어 있기에 국가 소유 차로 보이지만 다 개인 것이에요. 예전에는 국가에서 버스를 하기는 했다 하는데 기름이 없다 보니 이제는 다 개인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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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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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도 이용하고 기차도 이용해요. 초창기에는 기차만 이용했는데 2000년대 이후부터는 20톤짜리 트럭을 중국에서 많이 들여왔어요. 북한에서는 2만 달러 정도 했어요. 돈 있는 사람들은 중국에서 차를 들여와요. 그런데 개별적으로는 차를 못 들여와요. 그래서 북한 내 공장 이름을 빌려서 들여오죠. 해당 기업소에 자동차를 등록한 다음, 관리는 개인이 해요. 그렇게 하면, 기업소에는 수입의 몇 %를 주는 식으로 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는 거죠. 북한에서는 개인이 차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회사 이름으로 일단 등록한 다음 일정한 돈을 주고 개인이 운영하는 식이에요. 최근에는 운송도 빠르고, 모든 것이 신속화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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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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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나 다른 나라를 보면 외국인들도 많이 다니고, 여행도 많이 다니지 않나요? 그런데 북한 같은 경우에는 자기 지역에서만 다닐 수 있고, 자기 지역 내에서도 다니기 힘들어요. 예를 들어, 평양에 한 번 가려면 한 달이나 보름 정도 전부터 증명서 떼고 해야 해요. 그리고 지금(2021년 말) 코로나19 때문에 아마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에요. 북한에서는 정부가 다니지 마라고 하면 아예 안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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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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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나라에서 개인들이 택시를 운영하지 못하게 했어요. 북한은 개인이 돈을 버는 것을 단속하고 그래요. 그런데 돈 있는 사람들이 택시를 운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택시가 많아졌죠. 택시가 많아지니까 나라에서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택시 사업소를 만들고 택시를 가진 개인에게 달마다 버는 수입의 일정 부분을 바치게끔 했어요. 한국에서 세금 내는 것과 같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놨어요. 그러니까 택시 운전수들도 그거 좋다고 환영했죠. 마음껏 뛰고, 달마다 국가에 얼마 씩 들여놓는 게 좋다고 봤거든요. 제가 2018년도 나올 때에 혜산에도 택시 사업소가 생겼어요. 혜산 쪽에는 택시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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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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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집에 예전에 평양에서 일했던 여자가 시집왔어요. 이 여자는 여기로 시집왔는데 자기가 살아왔던 생활과 너무 판이하니까 계속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더라고요. 지방은 포장도로가 없어요. 다 흙길이에요. 그런데 이 여자가 길을 나가면 잘 걷지 못하더라고요. 한 발 딛으면 먼지가 나니까요. 한 발 걸을 때마다 먼지를 닦고, 또 먼지를 닦고 하더라고요. 저는 당시 그 여자에게서 평양에서 생활했던 삶을 들으면서 겉으로 표현은 못 했지만 속으로는 ‘이야… 우리하고 생활이 너무나 하늘 땅 차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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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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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북쪽, 량강도나 함경북도 사람이 평안남도 살려고 하면 엄청 많이 뇌물을 고여야 해요. 사실상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잘 사는 곳, 못 사는 곳 그렇게 갈라져 있어요. 함경남도도 북쪽으로 쳐요. 한 번의 기회가 있기는 해요. 특히 농촌 지역 자녀들은 운수가 좋아 군사 복무를 평양 같은 곳에서 배치 받아서 하면 복무 후 평양 쪽에 떨어지려고 하지 자기 살던 곳에 안 가려고 해요. 이걸 ‘지대 혁명’이라고 하는데 군사 복무로 지대 혁명을 하려고 해요. 농촌 자녀 같은 경우에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 꼭 군 복무를 일부로 하려고 해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사 가는 것은 통제하지 않아요. ‘어서 오세요’ 하죠. 북쪽으로 가는 것은 돈 안 먹여도 돼요. 반대로 북쪽에서 평안도로 올 때는 돈 엄청 먹여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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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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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이라는 것은 시내에서 산골 농촌으로 보내는 것이에요. 노동자였다면 신분이 농장원으로 바뀌기도 하죠. 도착한 곳이 공장이냐, 농장이냐에 따라 달라요. 추방당한 지역이 군, 면 급이라 노동할 수 있는 공장이 더러 있으면 노동자로 갈 수 있겠지만, 주로 추방하는 곳은 ‘리’ 단위의 산골로 보내는데 산골에는 공장이 없어요. 그렇게 대부분 농장원이 되어 농장에서 일해야 해요. 추방당하면 그곳에 적을 붙여야 해요. 보통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추방당한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해요.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돈을 얼마 고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러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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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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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2018년도에 법적 처벌을 받은 적 있어요. 그때 당시에는 보위부에서 처리되고 나서는 내보내졌어요. 제가 간 곳은 량강도 도보위부 구류장이에요. 그래도 형식적으로라도 조금 인권을 고려하기는 해요. 그런데 그것도 범죄에 따라서, 그리고 어느 만큼 자백하는지에 따라서 때리고, 안 때리고 하죠. 어떤 여자가 비법월경 하다가 중간에 누가 신고를 해서 잡혔어요. 그래서 보위부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한 것을 그대로 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 조사받으면서 튕기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보위지도원이 가죽장갑 끼고 그 여자를 세게 때리고 그랬어요. 지금도 중국으로 도망쳐 나갔다가 잡혀 온 여자들 구금되어 있는 곳에는 각목으로 때려요. 중국에서 잡혀 왔다가 보위부에서 조사받을 때 보위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짓말하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엄청 세게 때려요. 저랑 같은 호실에 구금되어 있던 한 여자는 중국으로 가려고 시도하다가 잡힌 사람이었는데 보위지도원에게 맞아서 귀까지 다 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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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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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소로 보내진다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관리소를 가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죠. 관리소를 간다는 것은, 김부자를 욕했거나, 나라를 반대하는 선전 행동을 했다는 말이에요. 만약 남자들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오버해서 잘못 말 했다거나, 모든 집에서는 김부자 초상화를 모시는데 어떤 사람이 ‘왜 매일 초상화를 닦냐?’고 무심코 말 했다거나, 하여튼 오직 김부자에 관련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관리소로 보내져요. 그리고 비법월경 해서 한국 도주를 시도한 사람도 보내지고요. 관리소가 북한 내에 몇 개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몇 개가 어디에 있다는 것까지는 우리는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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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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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전부에 대기실과 구류장이 있어요. 대기실은 편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곳이고 구류장은 정자세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해요. 살인이나 강력 범죄를 저질러 교화소로 보내질 사람들은 구류장에, 단련대로 보내질 사람은 대기실에 구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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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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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 들어가면, 집결소든 구금소든 다 같아요.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침구류를 정리해요. 8시부터는 이중 삼중으로 된 철창 안 감옥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허리를 펴고 양 무릎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밤 10시까지 앉아 있어야 하죠. 식사 시간 빼고는 계속 앉아 있어야 해요. 눈을 감거나, 졸거나,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눈알을 돌리거나 그러면 계호원들이 때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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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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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련대는 보통 간단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가요. 누구를 떄렸다거나, 한국 노래 듣다가 걸렸는데 뇌물로 줄 돈이 없다든가 하면 단련대를 가죠. 아니면 큰 범죄를 저질러서 뇌물을 고였는데 주변에 눈이 있으니까 그냥 내보내기에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다녀오는 척해야 할 때 가는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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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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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소는 단련대와 교화소 사이에 있어요. 단련대는 6개월까지, 교양소는 1년짜리이죠. 교화소는 3년 이상이에요. 우리 가족 중 한 명이 교양소에 갔어요. 함흥 영광의 오로교화소 내 1년짜리 로동교양소에 갔어요. 교화소에서도 1년 교양 대상이면 교양소에 들어가요. 교화소 내에 교양소가 있어요. 교화소 안에서 교양소를 따로 만드는 게 아니라 1년 노동 교양 대상이니까 교양을 따로 시켜요. 교화소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시킨다고 해요. 교화소 사람들이 일이 조금 약하다고 하면, 교양소, 즉 1년 있다가 가는 사람들은 노동 강도가 더 세요. 1년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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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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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던 교화소는 개천 1호 교화소였어요. 평안남도 개천에 있었어요. 여성 수감 인원은 약 1천 명 정도였는데 남녀 따로 수감되었어요. 남녀가 수감되는 곳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어찌 보면 조금 붙어 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여자 교화소에서 허약이나 병이 걸려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면 취장 뒤편에 사체실이 있어요. 조그마한 개굴처럼 만든 곳인데 거기다가 시체를 넣어 두곤 했어요. 여기는 여자 구역이다 보니 남자들이 여기까지는 못 들어와요. 그래서 우리 취장(취사장) 사람들이 시체를 거기서 꺼내서 남자들이 들어올 수 있는 구역까지 가져다 줘야 했어요. 화장을 하면 시커먼 연기가 올라가는 데 그걸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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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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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위부 구류장에 있을 때 저를 취급하는 취급자가 제가 가지고 있었던 손전화를 조사해 본 후 저보고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나가니까 휴대전화 안에서 녹음된 것을 들려주면서 ‘이게 무슨 말이냐?’라고 물어보더군요. 저는 모른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취급자가 ‘이 간나, 니 진짜 모르나?’라고 하며 저를 때렸어요. 가죽장갑을 딱 끼더니 주먹으로 막 때렸어요. 영화 속 장면같이 막 때려요. 수감자들은 그렇게 맞는 장면을 언급하면서 완전 영화 속에서 때리는 것처럼 때리지 않냐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취급자들이 맨날 그런 영화만 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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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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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 들어가면 이름이 없어요. 욕 같은 것은 뭐… 개, 돼지 취급을 하니까, 인간 이하 취급을 하니까 흔해요. 그저 막 욕설을 퍼 부어요. 저와 같이 있었던 다른 애들은 엄청 맞고 욕 먹고 그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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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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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가 한국 드라마를 봤다가 걸려서 교화 2년을 갔어요. 그렇게 가니까 주변 친구들이 다 놀랬어요. ‘헉, 진짜 가는구나...!’하고요. 그런데 드라마가 무서운 게, 한 사람만 보는 게 아니에요. 친구들이랑 같이 보고 그러죠. 그래서 한 사람이 딱 걸리면 옆에 같이 봤던 사람을 안 불 수가 없어요. 아무리 자기가 똑똑하고 입이 무겁다고 해도 일단 걸려서 조사받으면 말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정신을 아예 희미하게 만들어 놓기 때문이에요. 잠도 재우지 않고 새벽 3, 4시에 막 불러내서 조사하고 그러니까 있는 말, 없는 말 다 말하게 돼요. 그래서 그때 제 친구 50여 명이 다 잡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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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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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7년 보위부에 구금되어 있을 때 4월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어요. 발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썩어 들어가자 보위부에서 제 다리를 절단할 거라고 말을 할 정도였죠. 풀려난 후 집에 오고 나서는 계속 아편만 맞았어요. 아편을 맞으면 통증이 덜하니까 맞을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게 몇 시간 안 가요. 아픔을 참지 못 해 맞고 또 맞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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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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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 휴일이었어요. 휴일이긴 한데 거기 직원들이나 일요일에 쉬지 수감자들은 일요일에 쉬지 못했어요. 휴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명절에나 하루 쉬었어요. 하루에 부과받는 과제가 있는데 보통 하루 안에 다 끝내기 힘들어요. 일요일에도 일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은, 다 하지 못 한 과제를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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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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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나올 때쯤부터 돌아다니던 말이 최근에는 국가에서 총알이 아까워서 ‘너 한테는 총알도 아깝다’라는 식으로 말한 다음 구류장 안에서 때려 죽인다고 하더라고요. 총살은 안 하지만 죽이는 것이죠. 총살 한 번 하려면 총알을 7~10발씩 쏴야 하는데 총알이 아까우니까 그 후부터는 구류장 안에서 때려 죽이는 것이에요. 제가 아는 또래 남자가 있었어요. 한국과 북한 사이에 돈을 전달하는 애였는데 교화소 들어가서 3년 넘게 있다가 거기서 맞아 죽었다고 들었어요. 죄책감이 없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북한에서는 그저 사람 목숨이라는 것을 귀하게 보지 않아요.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법관들도 식은 죽 먹기로, 막 때리고 하죠. 맞아 죽은 사람은 걔뿐만이 아니에요. 제가 걔를 알아서 그렇지 제가 모르는 사람들도 얼마나 맞아 죽었는지 몰라요. 주로 구금시설 안에서 맞아 죽어요. 그렇게 때려 죽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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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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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하루 3끼 식사를 주기는 하나 나오는 음식의 경우 씻지도 않은 더러운 옥수수를 껍질째 주는데 그 양은 손가락 두 마디도 안될 정도로 적어요. 거기에 썩은 무 이파리 말린 것에 소금을 몇 알 넣어 만든 죽을 주죠. 두세 숟가락 뜨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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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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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서 다친 것에 대해선 제대로 된 치료 같은 것은 없어요. 무슨 암이라든가 아니면 아주 위급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면 치료받지 못 하죠. 그렇게 위급한 사람이면 그래도 치료는 하긴 해요. 보위부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게만 살려 두기는 해요. 그런데 당뇨나 간암, 복수로 배에 물이 차거나 그런 중병에 걸려서 재판 날짜까지 못 채우고 죽을 것 같다고 보이면 군의관이 치료하기도 하죠. 보위부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자기네들이 책임을 져야 해요. 하지만 재판으로 보내고 나서 죽으면 책임을 안 져도 돼요. 그렇기 때문에 보위부는 어떻게든 재판까지만 사람을 살리기는 해요. 재판 후 교화소에서 죽든, 다리가 부러지든 그거는 보위부에서 상관할 바 아니거든요. 자기네들 책임 한계 안에서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 두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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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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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는 인권이란 게 없어요. 법적인 도움을 받거나 진상을 밝히는 요청을 하거나 그런 것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 드라마랑 영화를 보니 경찰이 범인을 체포했을 때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느니 그런 말을 하던데 북한은 형식상으로는 변호사가 있으나, 그 변호사는 변호사가 아니에요. 그저 각본대로 움직이는, 형식상 재판소에 변호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앉혀 놓은 사람에 불과해요. 형기는 재판을 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어요. 재판소에서는 모든 것이 결정된 상태에서 죄인을 앉혀 놓고 형기를 읊어주는 것이 전부이죠. 재판 중 변론이나 재판 결과에 대한 반론이란 것은 없어요. 못 해요. 그런 분위기도 아니고요. 인권이란 것이 사라진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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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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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부 구류장에도 규정이 있어요. 새벽 6시 기상인데 자기가 덮고 자던 담요를 다 개야 하죠. 그걸 깔고 앉고 새벽 6시부터 올방자(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머리도 딱 90도 각도로 꺾어 숙이고 밤 10시까지 그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는 않더라고요. 아무튼, 양 손은 주먹 쥐고 무릎 위에 올려놓아야 해요.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있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도 하루도 아니고 매일 그렇게 해야 하죠. 걔네는 사정없어요. 여자들 같은 경우는 머리털이 있으니까 살창 안으로 손을 넣어 머리카락을 붙잡고 쇠창살에다가 그저 막 사정없이 부딪혀 짓이겨요. 남자들 같은 경우는 귀때기를 잡아서 막 비틀고요. 계호들마다 때리는 방식이 다 다른데 어떤 계호는 슬리퍼를 쥐고는 얼굴에 사정없이 휘두르며 막 때려요. 또 어떤 계호는 구금자에게 쇠창살 밖으로 손을 내라고 하고는 회초리 같은 걸로 손등을 사정없이 내려치죠. 그냥 멍이 드는 정도가 아니고 때린 자리가 불뚝 솟아 올라요. 사람이 순간적으로 딱 맞으면 혈관이 딱 올라오거든요. 그 정도로 막 때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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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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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을 다 하지는 않아요. 범죄에 따라서 교화소 보내거나 죽이지는 않지만 영원히 못 나오고 일만 하는 곳, 그러니까 관리소로 보내죠. 그게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도 밖에 나가서 일만 해야 하고 그러니까요. 제가 어릴 때 들은 소린데 가족이 4명이라면 가족을 통째로 관리소로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들어가면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요. 한 명이 집에 있는 시간에는 나머지 3명이 밖에서 각자 다른 곳에서 일하게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한 명이 밖으로 나가 일하면 또 다른 한 명이 들어와 잠을 자게 하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진짜 그런 동네는 엄청 엄격하다고 해요. 그 마을 안에는 말소리도 안 나고 엄청 조용하다고 해요. 완전 고요한 그런 마을인거죠. 그런 곳에 가는 사람들은 평생 일만 하다가 그냥 죽는 것이에요. 노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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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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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저 걔네들은 말은 잘 해요. ‘인권 유린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죠. 보위지도원이 그런 말 해요. 방침들이 내려오고, 저도 그런 것을 구금시설에 있을 때 알았어요. 맨날 그런 방침이 내려오고 하는데 그렇게 내려와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실행하겠어요? 아니에요. 인권이니 그런 말은 해요. 그리고 보안서를 들어갔다고 하면 거기에 계호원들이 있어요. 감시하는 사람들인데 하전사이죠. 걔네들은 우리에게 ‘야! 누가 떠들었어? 나와!’라고 하면서 철창 앞에 이마를 대게 해요. 그렇게 하고 나서 손을 철창 사이로 내밀어라고 하죠. 그 후 각자(나무 막대)로 손을 내리쳐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살겠어요? 하… 그렇게 맞고 나서 소리치면 또 소리친다고 뭐라 해요. 그런 일이 있으면 거기 계호 책임자가 또 뭐라는지 아나요? "인권 유린 때문에 그러는데, 너희 계호 선생님들 열을 받지 않게 좀 해줘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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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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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의 경우 예전에 보안서 예심 과정에서 인권과 관련된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어요. 2015년 아내는 약 6개월간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같이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에서 인권 때문에 떠들어서 사람 때리는 거 함부로 못 한다."라는 말이 돌았다고 해요. 북한에서는 조사를 받기 위해, 또는 죄가 확정된 후 구금시설에 들어가면 사람이 아닌 개 취급을 받아요. 때리는 것은 예사죠. 근데 아내가 들어갔을 때 마침 그런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구금 기간 아내는 맞은 적이 없다고 해요. 그때 당시에 구금 시설에서 사람 때리는 게 많이 잠잠해졌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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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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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함흥 교화소 안에서 공개 처형이 있었고 저도 직접 봤어요. 1명이 처형되었어요. 교화소 수감된 사람이었는데 교화소를 탈출한 후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다시 잡혀 온 사람이었죠. 총살당했어요. 모든 교화소, 단련대 사람들이 보게 했어요. 한 몇 백 명 됐어요. 9발 쏴서 죽였죠. 그렇게 쏜 다음 죽은 사람을 모두가 다 보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처형당하러 나올 때부터 이미 반 죽음이 된 상태였어요. 둘이서 양쪽에서 부축해서 그 사람을 공개 처형 하는 곳으로 질질 끌고 나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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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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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교수형을 봤어요. 당시 수천 명의 사람이 공개 처형장에 모였어요. 처형된 이유는 남조선 출판물을 접했기 때문이었죠. 최근에는 공개 처형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제 기억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개 처형을 많이 했어요. 제가 살던 라선에는 공개 처형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되면서부터 외국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기에 보는 눈이 있으니 안 하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북한 당국이 외국인들의 시선을 인식하고 있으니 그런 거죠. 공개 처형 해야 할 때는 라선이 아닌 다른 지방으로 죄수를 데려가 사형한다고는 들었어요. 여전히 공개 처형은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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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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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공개 처형에 대한 말이 별로 없는데 그것은 자체 집행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집행된 사형은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죠. 저는 검찰소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집행된 사형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공개 처형이 줄어들었다 뿐이지 사형은 계속 집행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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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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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북한에 있을 당시 보위부 사람과 조금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런 내용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최근에 들었던 말에 따르면 보위부라든가 보안서에 지하 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계호들 중에서 사람을 죽이는 계호가 따로 있어요. 처형하는 것을 공개하지 않고 그냥 지하에 묶어 놓고 뒤에서 사람이 들어와서 망치로 머리를 깐다고 했어요. 그렇게 까서 죽인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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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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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옆에 사람이 앉아 있다가 죽어도 보면 안 돼요. 곁눈질했다가는 죽도록 때리니까 하면 안 되는 거죠. 옆 사람이 맞아도 동정도 하지 말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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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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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장성택이) 잡혔을 당시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우리 남편 지인의 친구였어요. 그 사람의 말로는 자기는 진짜 그때 후들후들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로, 장성택을 딱 불러내서 사진도 찍고 그 자리에서 계급장을 딱 떼어 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온 대회 성원들이 다 보는 곳에서 족쇄 딱 채워서 데리고 갔다고 해요. 북한에 강건종합군관학교가 있는데 그 마당에서 총살을 했어요. 북한에 모란봉 악단이 있는데 걔네를 제일 앞줄에 앉혔다고 해요. 그러니까 김정은이 대에서 반항하는 애들이 어떻게 죽는가를 보라는 식이죠. 온 산에다가 군대를 다 풀고 총 걸어 놓고 쏘니까, 그걸 본 사람 말로는 사람이 진짜로 없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참관한 사람들이 다 졸도를 했다고 해요. 너무 기가 차서 기절했다는 것이죠. 당시 판결문을 읽어주고 그 장소에서 바로 자수하는 사람은 살려주겠다고 했다더군요. 다 알면서 일부로 그런 식으로 자수하게끔 하는 것이죠. 자수하지 않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잡아갔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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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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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우연히 먼 거리에서 처형 장면을 목격했어요. 차마 입에 말을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때마다 하려고는 하는데 제 자신이 이런 말을 숨기거나 꺼리게 되네요. 그때 시장 사람들을 공개 총살 현장으로 다 데려 가더라고요. 처형 대상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시범격이니까, 첫 총살이니까 공개적으로 90발을 쐈어요. 북한 말로 기관단총으로 쐈죠. 저는 먼 거리에서 봤는데 시체가 허물처럼 으스러져 녹아내리더라고요. 제가 아는 사람은 앞 좌석에서 봤었는데 까무라칠뻔했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공개 총살에 동원된 하사관(군인)들만해도 엄청 많았어요. 광장이 넘칠 정도로 사람도 많았죠. 2천 명도 넘었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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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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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 치료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어요. 치료하면 다 돈을 내야 하죠. 정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예를 들어, 애를 낳을 때 자연 분만을 못 하고 절개를 해야 할 때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병원을 가기는 해요. 개인 집에서는 수술이 안 되니까, 시설이나 도구가 없으니까 그런 거죠. 제왕절개 하는 것도 중국 돈으로 150위안 정도 받아요. 그리고 필요한 약도 따로 구해야 하고요. 돈이 없어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요. 간과 관련한 병이었는데, 배에 물이 차는 복수였던 걸로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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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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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병원에는 일체 약이 없어요. 구호는 무상치료제를 외치지만 약이 있어야 무상으로 치료를 하든 할 것 아닌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입원이라도 하자면 입원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환자가 구해와야 해요. 땔감, 먹을 것, 약 등 모든 것을 스스로 들고 들어가야 하는 거죠. 사람들은 중국 약을 많이 써요.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중국 약 중에 가짜가 많아요.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아편이 근절되지 않고 있어요. 아편은 웬만한 병을 치료할 때 다 쓰여요. 허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 될 때 등등 다 아편을 쓰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아편을 써요. 왜냐하면 제대로 된 약이 없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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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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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파는 집에 가면 이런 병에는 이런 약을 먹는다고 하면서 약을 줘요. 약을 파는 집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가던 곳은 집안 자체가 어머니대부터 약 장사도 하고 하면서 의학 지식도 되게 많고 그랬어요. 그래서 집에서 다 판단하고 그랬죠. 의학 지식이라고 하는 건,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라고 하기 보다 개인적으로 살면서 알게 된 지식을 말해요. 사람들은 약을 파는 사람이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서 찾아 간다기 보다는 그냥 가요. 불안해하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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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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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치면 무당 불러서 미신 같은 거 통해서 치료하는 사람도 있어요. 북한에도 그런 게 있죠. 하지만 북한은 무당이라는 것이 합법이 아니다 보니 숨어서 해요. 그런 사람들은 ‘액이 쌓여 있으니 어떤 방법으로 해라’ 이런 식으로 하기도 하고, 자기 혼자 공부해서 병을 치료하는 법을 터득해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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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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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약도 없고,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해요. 병원이라는 게, 제가 만약 병이 걸렸는데 저에게 적합한 약이 아스피린이라고 한다면 병원에서 아스피린을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약을 사오라고 해요. 병원에서는 이런 거 먹어라고만 하죠. 사실상 시장이 병원이에요. 시장에서 약장사들이 약을 파니까요. 거기는 없는 약이 없어요. 중국에서도 들어오고 소련 약도 있고 별난 약이 다 있어요. 장마당에 약장사가 얼마나 많은 지… 병원에서 처방해 주면 그걸 들고 시장에 가요. 시장에는 대부분 의사들이 약을 팔아요.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무슨 약이 필요한 지 아니까 약을 내어 주죠. 그래서 장마당이 병원이나 같아요. 병원에서는 진단이나 받는 거지 약을 받고 그런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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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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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사람들이 피임이나 낙태와 같은 것에 대해 잘 몰라요. 제가 살던 마을에 낙태를 해 주는 아줌마가 있었어요. 어떤 여자애가 있었는데 낙태를 두 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낙태해주는 방법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끔찍해요. 여자애를 벽에 기대게 한 뒤 주먹으로 아랫배를 수 차례 때렸어요. 낙태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 어디 때리면 되는지 잘 아는 거죠. 피가 쏟아지고 그래요. 그런 식으로 동네 사람들의 낙태를 해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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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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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큰 인민병원하고 가까이 살아서 그런지 제가 군내에서 살다 보니까 시골하고는 차이가 좀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2018년까지도 산부인과도 많이 다니고 뢴트겐, 여기로 말하면 CT라고 하던데 실험실에 가서 뢴트겐 촬영도 하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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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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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에서 약 파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의사들이이에요. 그 사람들은 다 병원에서 일하다가 돈이 안되고 하니까 장마당으로 나와서 일해요. 장마당 벌이보다 못하니까요. 병원에 일하러 나가봤자 월급도 안 줘요. 병원 나간들 뭐 하겠어요? 월급 안 주고 배급도 안 주는데요. 의사들도 먹고 살기 힘드니까 자기가 배운 기술은 있고 하니 시장에 앉아서 장사나 하고 있는 거죠. 약 중에는 요재(가짜)도 많아요. 장마당에서 약 파는 의사들도, 자기 단골을 만들기 위해서 자주 오는 사람들에게는 가짜를 팔지 않아요. 사람들도 자기가 약을 사러 간 곳의 약이 효능이 좋다면 다음에 그 사람에게 찾아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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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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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보통 여자들이 해요. 주변에 간호사 하던 사람을 보면 입원한 환자 가족들이 환자를 면회 올 때 마다 그 사람들로부터 음식, 물건 등을 받았다고 했어요. 환자 면회오는 가족들은 보통 빈 손으로 오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죠. 환자를 잘 보살펴 주면 환자 가족들이 고맙다고 주곤 한다고 했어요. 무엇이라도 조금 줘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진료도 받지 못 해요. 간호사로 일하다가 결혼하면 병원을 그만둬요.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것이죠. 결혼하면 집에서 집안일을 하든, 장마당에 나가서 돈을 벌든, 가정을 위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살림을 살거나 돈을 벌어야 하지, 월급을 주지도 않는 직장을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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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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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장마당보다는 개인집에서 더 많이 사요. 장마당에서도 살 수 있기는 한데 파는 곳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따로 장사하는 개인집이 있는데 약은 그런 민간에서 사요. 그냥 일반 집이에요. 김정숙군에 약국이 하나 있기는 해요. 그런데 그 약국 마저도 그냥 개인이 자기 돈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보면 돼요. 김정숙군 약국에서 일한 사람은 약사였던 것 같기도 해요. 약국이든 개인 집이든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요. 가격 차이는 없어요. 다 똑같다고 보면 되는 거죠. 약의 질에서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약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죽고 이런 것은 드물어요.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많이 와요. 독일, 러시아, 일본 약도 있죠. 보통 이런 약들은 세관을 통해 들어와요. 세관으로 들어와도 들여오기 전까지 드는 비용과 밑작업은 일반 사람들이 한다고 보면 돼요. 국가가 돈이 없으니까 장사꾼, 도매꾼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 약을 사다가 소매꾼들에게 넘기면 소매꾼들이 전국으로 나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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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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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유엔에서 약을 주면 국가가 받아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궈 줬어요. 이 약은 병원으로 가요.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병원으로 간 약이 개인 주머니로 들어가서 그 약을 약국에 팔아요. 그렇게 빼돌려서 팔아버리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유엔 약이 어떻게 개인 약국에서 팔리고 있겠어요? 중앙에 가서 가져올 수도 없는 건데요. 약국이란 게, 개인이 집에서 하는 개인 장사인데요. 약집인 거죠, 약집. 그 사람들은 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원장, 부원장, 약품 관리하는 그런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을 통해 약을 빼돌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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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함흥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01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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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료가 부족해서 그렇지 의료 시설과 같은 하드웨어와 의료진과 같은 소프트웨어 등 필요한 체계는 다 갖춰져 있어요. 교육만큼은 한국 못지않게 북한도 잘 되어있고요. 오히려 북한이 더 뛰어난 부분도 있어요. 저는 북한과 한국 약학 교재를 다 경험했는데 교과서만 봐도 북한이 더 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국과 북한 학생의 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북한 학생도 한국 학생 못지않게 뛰어나고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요. 북한 보건의료는 체계는 잘 갖춰져 있으나 원료와 재료가 부족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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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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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시작되고 나서, 제가 북한으로 몇 번이나 통화했어요. 그때 북한에 사는 제 지인들은 코로나19 때문에 죽은 사람도 없고 심각하지도 않다고,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북한이 코로나19가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마스크는 쓴다고 말 하더라고요. 마스크는 어디서 구하냐고 물어봤는데 북한에서 마스크를 다 만든다고 하더군요. 북한은 개인 집에 미싱이 많은데 그렇게 만들어서 쓰는 것 같아요. 매일 사서 쓰는 게 부담스러우니까 집에서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개인들이 만들어 쓴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처럼 특수 재질로 만든 마스크는 아마 많이 없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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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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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벌어 하루 살고, 하루 일해서 하루 먹을 쌀 사고 그런 집들은 코로나19 봉쇄 때문에 밀수 막히고, 장사 막히고 그래서 하루하루 죽을 맛일 것이에요. 그런 집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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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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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북한에 있을 때 보면, 예방 접종은 무조건 시켰어요. 왜 그러는가 하면, 나라를 위해서이죠. 유엔에서 예방접종 약이 내려오더라고요. 그건 안 맞겠다고 도망가도 무조건 찾아내서, 새벽에라도 주사를 맞혀요. 독감, 파라티푸스, 폐렴 주사 같은 것은 다 맞아야 해요. 그리고 어린이들은 소아마비 주사도 놔 줘요. 단계적으로 1, 2, 3차 이런 식으로 해마다 한 번씩, 예방주사는 무료로 해 줘요. 그런 걸 안 맞으면 퍼지니까요. 예방의학은 잘 되어 있어요. 그런데 코로나19에 대한 예방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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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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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있다고 해도 한국처럼 크게 떠들고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북한 정부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에 대해 떠드는 것을 싫어해요. 민심이 혼란해지고 그러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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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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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북한에 있는 가족과 연락했어요. 그때가, 제가 2021년 5월경에 전화를 한 것 같은데 통화를 조금 오래 했어요. 그냥 코로나19 때문에 국경 막고 그러니까 모든 물가가 다 뛰어올랐고 살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코로나19가 있고 그런 말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감기가 엄청 세다고 하면서 앓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조심하라고, 그게 코로나19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통화는 못하고 문자로 그냥 연락했어요. 요즘 엄청 단속이 심해서 통화하기 힘들어요. 만약 검사를 했다면 제가 통화를 했을 때 분명 저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런 말은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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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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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2월에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혜산 내에 20일 정도 사람들을 집 안에 격리했다고 하더라고요. 장사도 못하고 그렇다고 들었어요. 당시 음력 설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집 안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도로 자체를 다니지 못하게 막았어요. 기껏해야 집 앞 까지만 나갈 수 있게 한 거죠. 코로나19 때문에 그렇게 봉쇄해서 먹을 게 없다 보니 엄청 힘들게 한동안 살아야 했다고 해요. 음식이나 생필품을 지원해주고 그런 것은 전혀 없어요. 당장 오늘 갑자기 격리 조치가 내려져도 상관없어요. 이게 어이가 없는 것이죠. 코로나19로 죽었다고 해도 다른 병으로 죽었다고 할 것이에요. 북한은 너무 사람을 사람같이 대하지 않아요. 북한 사람들은 진짜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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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북도 금천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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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철저한 감염병 예방 시스템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장티푸스, 결핵 같은 감염병이 생겼다고 해도 한국처럼 조심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병에 걸리면 돈이 많이 나가거나 아파서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북한에는 TV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것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감염병에 대해서 잘 몰라요. 북한에서는 중앙 티 비만 있다 보니 거기서 안 내보내면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모를 수밖에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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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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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는 안 나오는 날이 많아요. 혜산 같은 곳은 수도가 안 나오기 시작하면 열흘, 보름씩 막 안 나올 때가 있어요. 아파트에 공동 우물이 하나씩 있는 곳은 그래도 괜찮은 곳이죠. 우물물은 그냥 땅 속에서 나온 물이에요. 소독하는 것은 없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혜산에서도 제일 골 안에 살아서 집에 수도가 없었어요. 그래서 압록강 물을 퍼 먹었어요. 비가 오면 압록강에 흙물이 내려오는데 그 물도 먹고 새 물이 내려오면 새 물을 먹고 그랬어요. 물은 대체로 안 끓여 먹었어요. 끓여 먹으라고 말은 해요. 하지만 끓여 먹으려고 해도 나무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없는데요. 그러니까 그냥 누런 흙물이 내려오면 그런 물을 받아서 정제시켜서 흙을 가라 앉혀 밑에 가라앉은 것을 버리고 위에 물을 떠서 먹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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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함흥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01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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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식 화장실이 아직 일반적이며 화장실 근처에 우물이 있는 경우도 많아요. 이로 인해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등 감염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발생해요. 이러한 감염병은 병을 앓는 사람뿐만 아니라 병을 앓았다가 완치된 사람, 그리고 건강한 사람도 균을 가지고 있는 보균자일 수 있어요. 이런 보균자가 수두룩해요. 육안상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균을 달고 다니는 것이죠. 그래서 계속 균이 전파되고 병이 재발되는 거예요. 이런 것이 워낙 일상이다 보니 크게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무시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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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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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군 같은 경우에는 아편을 많이 썼어요. 거의 모든 집에서 아편을 직접 채취했는데 단속을 하니까 몰래몰래 개인 밭 가운데 숨겨서 양귀비를 재배하곤 했어요. 많이는 못 심어요. 그러다가 단속되면 다 뺏기고 그러죠. 처벌도 물론 받아요. 보통 많이 심는다는 집은 50대 정도 심었어요. 대체로 집안 사람 다 아편을 맞는 건 아니고 어른들이 맞곤 했어요. 처음에는 아파서 아편을 맞기 시작하지만 맞다 보면 중독이 와요. 그러면 일을 하기 위해 아편을 맞아야 하는 상황까지 오는 거죠. 그래야 힘이 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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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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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반화되었어요. 일반화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해보면, 마약을 안 하는 사람이 도리어 ‘시대에 뒤떨어진’, 밀리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져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이겠어요? 그만큼 마약 구하기도 쉽고 판매자도 많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마약으로 돈을 버는 게 쉬워요. 밑천이 없어도 물주 있는 곳에 가서 조금씩 외상 떼어 다가 소분해서 팔고 그러면 돈을 쉽게 벌죠. 마약 하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법관들 자체가 마약을 더 해요. 그건 음식이나 같아요. 형식적으로 처벌을 한다고 규정되어 있기는 해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마약을 판매한다고 하면, 그 사람 집에 가서 마약을 할 수 있고 하니까 오히려 친해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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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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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두 같은 경우도 진짜 약은 약이에요. 뇌출혈이 와서 혀랑 입이 막 돌아갔을 때 빙두를 쓰면 바로 돌아오고 그래요. 아편 같은 것은 보통 집에서 밭을 뚜지고 사는 사람들이면 다 길러요. 아편을 먹으면 토하고 그러니까 약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병이 치료가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신기하더군요. 오한에 피를 쏟던 병이 없어지니까 아편을 한 번씩 먹게 돼요. 감기 왔을 때도 아편을 써요. 그러니까, 아편이라는 것은 북한 사람들에게는 만병통치약인거죠. 그리고 약이 없다 보니, 비싼 돈을 주고 약을 살 수 없다 보니까 대체로 아편으로 치료를 하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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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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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두 같은 것을 하면 하루 꼬박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먼 길을 운전하는 운전수들이 하죠. 여기 한국은 길이 좋아서 괜찮지만 북한 같은 경우는 길이 나쁜데 먼 곳, 도와 도를 건너서 수송해 오자면 한 2, 3일씩 걸려요. 그 사람들이 밤낮으로 계속 운전하자면 졸리지 않겠어요? 집에서 여자들이 빙두를 하는 경우는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도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묵은 일, 북한에는 손빨래를 하기 때문에 밤에 빨래든 집청소든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밤에 일을 다 해치운다고 해요.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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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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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도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중반부터 많이 사용했어요. 함북도, 함남도에서는 그전부터도 마약을 많이 썼고요. 마약도 비싸다 보니까 경제적인 부분이지 않겠어요? 중독될 정도로 빙두를 자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한 번씩, 호기심에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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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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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에서는 빙두를 많이 했어요. 빈곤한 사람들은 빙두를 할 생각을 잘 하지 못하지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했어요. 그런 집에 가면 그냥 일반적으로 빙두를 하곤 했어요. 쉽게 생각하면 이래요. 한국에서 집에 손님이 오면 ‘커피 드실래요?’ 이렇게 하면서 대접하듯이 북한에서는 일반적으로 조금 산다는 집에 손님이 오면 빙두를 같이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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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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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 특히 간부들은 마약을 많이 사용해요. 근데 안 하는 사람은 아예 안 해요. 어쨌든 마약을 중국 쪽에다가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아니까 개별적인 밀수꾼들이나 외화벌이 하는 사람들이 보통 얼음, 아이스라고 말하는 마약을 비법적으로 밀수출 하거나 외화벌이를 위해 거래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륙에서는 함흥 지역에서 빙두를 제일 많이 해요. 뭐 거기는 빙두 생산지이자 원천지이니까요. 그런데 그 외에, 청진 쪽은 빙두를 크게 생산하지는 않는데 함흥 쪽에서 날라 와서 국경으로 넘겨 되걸이 하는 놈들이나 빙두를 조금 하는 놈들이 있다고 보면 돼요. 조금 있는 게 아니라 많아요. 소매하는 사람도 많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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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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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산의 경우 아편은 크게 접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런데 빙두라고 하게 되면 그래도 많이 말을 들어본 것 같아요. 아편은 그냥 민간, 사람들이 텃밭이 조금씩 있으면 밭에다가 약으로 재배하고 그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 원산시 인구가 약 40만 명 정도 돼요. 그 중에 젊은 층, 2030세대 중에서는 한 40% 이상은 알고 있다고 봐도 돼요. 왜 알고 있냐고 하면, 보위기관이라든가 안전기관에서 마약을 하지 말라고 선전하는 식으로 교양 사업을 계속 하거든요. 그런 데서 마약을 알게 되는 거죠.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벌써 보위기관이나 보안기관에서 그렇게 교양 사업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마약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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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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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자기가 어디 가서 마약을 사는 것은 아니고 부모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게 좋은 지, 나쁜지도 모르고 궁금하니까 그냥 하곤 해요. 빙두를 태울 때 쓰는 기구를 공구라고 하는데 그 공구를 어디에 치워 놓는지를 그 자식은 알 것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모들이 나간 다음에 자식들이 몰래 불을 붙이든 뭐든 본 거를 따라 하고 그래요. 빙두는 불을 붙여 태워서 흡연하는 것이에요. 애들도 할 정도로 일반화되었어요. 제가 나올 때 까지는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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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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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마약을 하다 걸리면 줄줄이 드러나게 되고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샀다는 말이 나오면 그 사람이 잡혀가요. 마약을 파는 사람을 잡아가요. 물론 마약을 한 사람도 잡아가고요. 그런데, 전반적으로 마약을 많이 하니까, 마약을 한 사람을 조사해서 파는 사람을 잡아가는 식이에요. 처벌을 세게 주기는 하는데 돈이 있어서 처벌하는 기간에 돈을 넣으면 그 기간에 나올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징역을 가야 해요. 북한은 뇌물만 있으면 풀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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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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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사업에 부작용이나 건강 같은 그런 내용은 없어요. 그냥 마약을 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사상이 나빠진다고 말하죠. ‘사상이 변질되고 부패되고 자본주의 맛을 알게 된다’ 뭐 이런 식으로 강조해요. 건강보다는 사상적인 면에서만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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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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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든 배급이든 그런 건 하나도 없었어요. 북한에서는 월급이라고 하지 않고 ‘로임’이라고 해요.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북한은 그런 게 없거든요. 공짜로 일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일했어요. 우리 같은 건 거기서 농사를 따로 짓고 살아야 했어요.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 받아서 감자 농사짓고 그랬죠. 회사 책임자한테 "오늘 밭에 좀 가야 하는데 시간 좀 달라."고 요청하면 빼 주곤 했어요. 그렇게 빠져나오면 밭에 가서 농사일하곤 했어요. 시간을 받는다고 해서 따로 직장에 돈을 바치거나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 무슨, 안 그래도 공짜로 일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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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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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은 나와요. 하지만 다 알다시피 북한이 계획경제 이런 것이 붕괴된 지 오래 전이잖아요. 계획경제가 진행될 당시 제정된 월급이나 가격을 ‘국정가격’이라고 해요. 그런데 계획경제가 무너지면서 국정가격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사실상 다 시장가격으로 유통이 되는데 월급이 여전히 국정가격으로 계산되어 지급되는 거죠. 국정가격으로 쌀 1kg에 북한 돈 1원도 하지 않아요. 10전 정도 하려나요? 제가 한국에 오기 전에 쌀 1kg에 북한 돈으로 4,500원 정도 했고 제일 싸구려 담배 한 갑이 2,000원 초반대였는데 월급은 140원 받았어요. 월급 140원 가지고 사탕 두 알도 못 사요. 사탕 한 알이 100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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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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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전역하고 난 후 첫 직장은 나라에서 배치해줘요. 보통 이걸 집단배치라고 해요. 하지만 나중에 제가 원하면 다른 공장으로 옮길 수도 있어요. 직장을 옮기려면 옮겨가는 직장에도, 떠나는 직장에도 담배 한 보루는 줘야 해요. 노동과에서 도장 한 번 찍는데도 한 갑을 줘야 해 주고요. 상황에 따라 주는 뇌물 양도 달라요. 좋은 기업소는 주로 ‘회사’ 같이 중국과 무역하는 곳이에요. 최근 공장에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 봤자 그저 기계 한두 대 정도예요. 사람은 일하러 나오는데 공장 안의 기계는 돌아가는 게 없어요. 사람들이 일하려 나와도 할 게 없으니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을 돌격대로 동원해 빼 가곤 해요. 돌격대에 동원되면 철길 건설 같은 것을 해야 해요. 그렇게 가면 몇 개월씩 거기서 일하고 자고 해야 하죠. 공장 일하는 것보다 동원 나가는 게 더 싫어서 사람들이 공장에 잘 안 나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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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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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출근하면 무조건 직장 돌격대를 가야 해요. 직장 별로 몇 명씩 차출되는 거죠. ‘평양돌격대’, ‘삼지연건설’, ‘황해도물길공사’ 등등 여기 몇 명, 저기 몇 명씩 각 공장에서 뽑아서 몇 달씩 교대로 거기로 가서 일해야 해요. 즉, 나라에서 김정숙군에 “300명 보장하라!”라고 지시가 내려오면 김정숙군 내 공장마다 인원수에 따라 몇 명씩 돌격대로 보낼 인원을 나눠 배정해요. 그래서 공장 지배인은 돌격대로 엄청 머리 아파해요. 직장 인원을 돌격대 보내려고 해도 각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고 그러니까 가기 싫어하거든요. 돌격대로 차출되면 몇 달 동안 숙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자기가 다 부담해야 해요. 그래서 돌격대 가야 하는 사람이 돈 없다고 못 가겠다 하면 같은 직장 사람들이 돈을 얼마씩 내서 보태 주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어느 직장이든 돈을 안내라고 하는 날이 없어요. 돌격대를 가면 뼈빠지게 일해야 해요.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은 돌격대 뽑히면 돌격대 대장하고 사업해서(뇌물로 매수해서) 돌격대 안 가고 놀고 그래요. 아무튼, 직장 다니면 돌격대도 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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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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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 보장’이라고 해서 국가에서 은퇴하게끔 하는 제도가 있어요. 여성의 경우 만 55세 이상, 남자는 만 60세에 은퇴해요. 직장에서 은퇴한다뿐이지 사회동원(노력동원) 같이 국가에서 시키는 일은 여전히 해야 해요. 원래는 노동력 상실 연령이라 아무 일도 안 해도 되지만 실상은 여전히 해야 하죠. 북한은 소학교 1학년 들어가면서부터 아이들에게 작업을 시켜요. 65살까지 사회동원을 해야 하고요. 제가 거주하는 동의 동사무소 사무장이 "오늘 어디 어디에 작업과제가 있다."라고 지시하면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세대마다 거기로 다 나가서 일해야 해요. 동원 일을 해도 돈을 준다고 하거나 그런 것은 전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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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삼지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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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와서 한국 대학생들을 보니까 공부도 많이 하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대학교에 다닐 때 그런 기억이 거의 없어요. 첫 강의는 8시 30분에 시작해요. 하루에 3개의 강의가 있다면 보통 1개 강의가 끝난 후 나머지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이 전부 나가서 나라에서 시킨 일을 해야 했어요. 수업을 다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저는 강의를 받는 대신 도로 보수작업도 하고 그랬어요. 학교를 나가지 않는 일요일에도 쉴 때가 거의 없었어요. 학교에서 운영하는 땅이 있어요. 일요일에도 거기로 나가서 곡식농사나 밭일을 해야 했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생산물을 나눠 준다고 말은 하지만 거의 준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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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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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들이 탄광에 자원 진출했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그건 자원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막말로 고아들은 누가 거둬 줄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할 방도가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국가가 책임지고 직장 기업소 등에 배치를 하고는 하지만 직장에서도 받겠다는 곳도 없어요. 그러니까 강제적으로 보내는 거죠. 고아들이 자원해서 탄광에 자원해서 진출? 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저는 믿겨 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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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200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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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 따라 간다고, 우리 부모님이 당이라든가 3대를 내려오는 족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많이 이야기해줬어요. 그런데 가족에게도 피해가 있다 보니까 그래요.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지주였는데 그로 인해 신분이 좋지 않다는 낙인이 딱 찍혔어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도 대학과 군대를 나가지 못했어요. 우리 아버지도 신분 때문에 잘 하는 것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부모님도 밖에서 남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만 많이 이야기해주곤 했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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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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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농장 실태를 통해 북한의 비극을 볼 수 있어요. 북한에서는 남자들의 경우 부모가 농장원이라면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들까지 농장원으로서 평생 농사일을 해야 해요. 자기 희망대로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농장원의 자식이 군대에 가서 10년 군 복무를 하고 왔다고 해도 농장으로 복귀해서 일해야 해요. 다른 일을 할 수 없죠. ‘농촌 진지 강화’라는 명목 하에 일해요. 그래서 농장원의 자식들은 부모를 원망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식들은 보통 ‘왜 다른 부모들은 다 노동자인데 왜 아버지는 농장원이 되어서 자식들까지 이런 농장에서 일하게 만드나?’라는 식으로 불만을 느껴요. 이렇듯, 농장원은 자기 희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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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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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는 할 일이 있을 때는 하고, 없을 때는 사람들이 휴식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매일 출근은 해야 했어요. 북한에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해야 해요. 그저 일요일 하루 쉬는 거죠.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해서 11시까지 일하고 2시간 반 동안 점심을 먹어요. 북한에서는 자기 집 가서 점심을 먹고 오죠. 다들 직장 주변에 살다 보니 멀어도 30~40분만 걸어가면 돼요. 오후 1시 반까지 다시 직장에 돌아와 일 시작해서 5시까지 일하고 퇴근해요. 나라에서 일하라니까 그러지, 일 안 하면 단련대 쳐 넣으니까, 시끄러워지니까 일을 형식상으로라도 하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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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양직할시
- 남
- 1960년대 출생
- 199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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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오기 전에 평양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교육은 대략 "외국에 나가서 절대 혼자 외출하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언제 어디서 남조선 안기부 놈들이 나와서 덮친다. 그놈들은 덮치는 순간 마취제를 사용해서 비밀 다 뽑아낸 다음 죽이는 놈들이다."는 내용이었어요. 즉, 혼자 나가면 위험하다고 말해요. 또, "남조선 대사관 주변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다 찍힌다."라고 말 하기도 했어요. "안기부 놈들은 그렇게 찍은 사진을 국제 재판소에 들고 가서 공화국(북한) 공민이 왜 자기네 대사관에 와서 무슨 짓을 하려고 모략을 꾸미느냐는 식으로 주장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남조선 놈들은 이런 놈들이기 때문에 남조선 대사관 주변에는 가지도 말고 혼자 움직이지도 말라’고 했어요. 이런 사상 교육을 받은 후에 쿠웨이트로 올 수 있었어요. 이건 일반 강연회에서도 받았고 평양을 나오기 전에는 특별히 더 1, 2시간에 걸쳐 주입 교육을 받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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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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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뉴스랑 그런 것을 많이 보고 오셔서 이야기를 조금씩 하셨어요. 그런데 새로운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는 못 해 주셨어요.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돌아올 때 지장을 찍고 나와요. ‘내가 나가서 여기서 있었던 실제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확인하는 증거를 남기고 나오는 거죠. 그래서 아버지 본인만 알고 있어야 했어요. 혹간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는데 저는 당시 그런 이야기에 대해 상상이 잘 가지 않을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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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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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그 전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사회주의 사회에서 직장에만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장사라는 것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장사를 하는 것을 다 터득했어요. 그래서 생활력이라는 게 생겼죠. 그러니까, 지금도 물론 그렇게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1990년대에 진짜 많이 굶어 죽은 그때는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언젠가는 나라에서 다시 직장 나가면 월급도 주고 쌀도 주고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렸던 그런 사람들이 다 죽었던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그 과정을 다 겪었기 때문에 살아 남으려면 무조건 장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물건도 교류하고, 외국에서 들여올 것은 들여오고, 그런 식의 상개념이 발달했어요. 저는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예전과 같이 굶어 죽고 그런 사람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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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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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랑 평안남도에 엄청 큰 평야가 있는데 거기 농사 짓는 거를 가을쯤 되면 각 군수공장에 배급을 해 주게끔 맡은 행정단위가 있어요. 군수공장에서는 그때 되면 차를 몰고 논이면 논, 밭이면 밭 현장으로 나가서 벼나 곡식을 다 현장에서 인수를 해요. 군수공장 사람들이 직접 와서 탈곡한 후 다 인수를 하는 거죠. 저도 군수공장을 다녔어요. 실제로 보니까 농촌에 곡식을 걷으러 갈 때 각 농장원들 집을 보안원들이 일일이 수색을 해서 들춰내 보고 걷어 갈 만한 게 있는지 다 확인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농촌 사람들 것을 빼앗아 내는데, 그래도 그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은 또 자기네가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장이나 길거리에 늘어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팔고 사고 하면서 자기네 생계를 유지하더라고요. 일체 받는 게 없는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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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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뙈기밭에 자기가 먹고 살 것을 심어요. 나라에서 지시한 것과는 상관없이요. 그러니까 (국가 소유의) 농장 밭에 나가기보다는 자기 개인 밭에 나가서 밤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거기서 뭘 심고 가꿔요.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군, 리에 있는 사람은 거의 100% 뙈기밭을 가지고 있어요. 시내에 있는 사람은 일부는 가지고 있고요. 장마당을 통해서 벌지 못하는 사람은 산에 가서 농사를 짓든지 해요. 뙈기밭 같은 경우 ‘이게 니 땅이다’ 이런 식으로 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대신 개인이 땅에 뭘 심으면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어라’는 식이에요. 그런데 산에는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서로 타협을 해요. 나무는 심되 꺾지는 말고 남은 공간에 작물을 심어라는 식으로 타협하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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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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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몇 정보가 있으면 정부가 요구하는 수확률이 있어요. 하지만 실상 정부에서는 농사를 위해 내어 주는 비료라든가 영농에 필요한 공구라든가 그런 것을 잘 지원해주거나 보상해 주지 않아요. 아예 보상이 안 되는 것은 아닌데, 보상해주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한 거죠. 비료가 충분하지 못하니까 농사가 잘 안될 수밖에 없어요. 농사를 잘 짓자면 농장원들이 사비를 들여서라도, 빚을 내서라도 다른 영농 기구라든가 비료 부족한 것을 사야 해요. 그렇게 해서 농사를 다 짓고 나면, 농사 짓는 기간 농사를 위해 냈던 빚을 다 물어줘야 하잖아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농사 지은 것의 일부를 떼어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 정부에서는 농촌에서 제일 먼저 거둬가는 게 군량미예요. 그런데 농촌에서도 봄, 여름에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이렇다 보니 실제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들이 배를 제일 많이 곪고 있어요. 나라에서 배급을 준다고 하지만 그게 두, 세 달 치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면 그 1년의 나머지 동안은 먹을 게 아예 없어요. 그렇다 보니 농촌 사람들은 살 길이 없어요. 그렇게 살기 힘들어서 다 농촌 출신을 벗어나려고 노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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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200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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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는 기계가 없어요. 가을철이 되면 옥수수나 감자 이런 것을 많이 수확해야 하죠. 제가 간 곳은 항상 감자나 옥수수 농사를 하는 곳이었어요. 이것은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보내는 거라 학생들이 다 가곤 했어요. 보통 1년에 한 번, 가을에 가요. 한 번 가면 거의 20일에서 한 달 정도 하고 와요.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맡은 일을 다 끝마치고 오는 거죠. 우리는 보통 빈 몸으로 지원을 나갔어요. 일단 호미는 다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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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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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심했던 적이 있어요. 2013년인가… 너무 가물어서 곡식이 정말 적었죠. 그리고 제가 오기 전인 2016년에 수해가 한 번 났어요. 그리고 어제(2021년 8월) 제가 북한 쪽이랑 전화를 했는데 며칠 전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길뿐만 아니라 골짜기에도 물이 넘쳤다고 해요. 북한에는 산에 나무가 없어요. 나무가 없으니까 아예 딱 보면 벌거숭이에요. 완전. 그런데 그게 다 밭이에요. 밭을 소토지라고 해요. 나무가 없어서 골짜기로 물이 엄청 내려와서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요. 숱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피해가 났다면 올해 똑같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요. 피해가 나지 않는다고 장담을 못 하는 거죠.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날 것이라는 사람들의 우려심은 항상 있어요. 나라에서는 대비를 하라고 하지만 형식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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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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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는 다 개인이 알아서 가져와야 해요. 보통 인민반장이 조직사업을 해요. 삽 있는 사람은 삽, 어느 세대는 곡괭이, 누구는 마대 등등을 가져오라고 작업을 조직해준다는 말이죠. 완전 무보수예요. 그래서 열심히 안 해요. 만약 비가 많이 와서 도로가 무너졌다고 하면 동마다 특정 구간 별로 보수 공사를 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요. 그러면 동에서 아침에 사람들을 다 불러내요. 머릿수 바글바글하게 사람들이 몰려 나가죠. 그리고 자기 구역 일을 해요. 구역 일을 할 때는 또 거기서 인민반마다 일하는 곳을 나눠요. 일한다고는 하지만 그저 대충하는 척했다가 들어오는 식이에요. 일해도 돈을 안 주니까 그런 것이죠. 그러면 다음 번에 비가 올 경우 또 무너져요. 그러면 또 나가서 대충하다 들어오고요. 매번 그렇게 하는 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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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8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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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밀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있어요. 혜산 통틀어서 네 곳에서 했어요. 혜산의 양순백화점에서 할 수도 있고… 어쨌든 백화점, 상점 이런 곳에서 군데군데 나가서 했어요. 혜산에는 백화점, 상점이 많이 있어요. 큰 백화점이라고 하면 양순백화점이 있고, 큰 상점은 혜산 역전 모란상점이 있죠. 혜산시에서 양순백화점, 모란상점이라고 하면 가장 큰 마트라고 볼 수 있어요. 여기서 판매되는 물품은 대부분 국가밀수로 들여온 것이라 보면 돼요. 여기서 각 도, 군으로 팔려 나가죠. 도매 주는 것이라 보면 돼요. 물론, 식료품도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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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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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한다고 해도 밀수는 어떻게 하든 다 해요. 코로나19로 단속한다고 해도 밀수는 제가 생각했을 때 막지 못 해요. 연선(접경지역)에 있는 집들은 초소 군대(국경경비대)들 하고 몰래 짜고 밤에 짐을 주고받아요. 그래야 사니까요… 밀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지금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걱정이에요. 먹는 문제가 심각해요. 원래부터 북한은 먹고 사는 게 힘들었어요. 식량은 항상 부족해요. 그저 먹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야단이에요. 시장에는 상품이 없고, 물건이 떨어지고, 그런데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중국에서 들어온 것들이 북한 전국 각지로 다 나가는 건데 밀수와 무역이 막히다 보니 사람들 생활 수준에서 딱 드러나요. 벌써 힘든 게 나타났어요. 중국하고 밀수도 활발하고 유통이 잘 되면서 물건이 많이 들어오면 사람들 생활이 많이 나아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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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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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은 고정되어 있지만 밀수꾼 밑에서 숱한 사람들이 벌어먹어요. 북한에서는 보통 장마당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사람도 있고, 농촌 등 다른 지역이나 구석으로 가서 물건을 구해오는 사람도 있고, 그런 물건을 나르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 간에 원하는 것을 증개해주는 사람도 있어요. ‘됫꼬(되꼬)’ 라고 부르는 장사꾼들은 보통 여자들인데 이 사람들은 밀수꾼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넘겨주는 식으로 해서 돈을 벌어 먹어요. 자기 돈으로 콩, 남새(아채) , 쑥 같은 것들을 싹 사버리죠. 일반 사람들 중에서 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콩이 필요한 경우 이들에게 가면 저울질로 계산해서 일부 차익을 남기고 되팔아요. 됫꼬가 100원에 물건을 샀다면 팔 때는 110원에 파는 식이죠. 일반 사람들도 그걸 알지만 됫꼬가 물건을 많이, 여러 종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 가서 사요. 밀수꾼이 도매로 물건을 취급하면 됫꼬가 중간 업자인 것이죠. 됫꼬는 한국의 중개업자나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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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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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에는 먹을 것도 그렇고 없는 것이 없어요. 한국에 있는 것은 다 있어요. 중국에서 다 넘어온 것이죠. 량강도뿐만 아니라 내륙지역 장마당도 똑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황해도 쪽은 잘 모르겠으나, 평안남도, 함경남북도 이 쪽은 장사차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해요. 아이스크림도, 평양 아이스크림이 냉동상태로 혜산에 들어와요. 아주 먼데도 말이죠. 평양에서 혜산까지 1,000리(400km) 길이에요. 혜산에서 전화로 평성, 평양에 물건 붙이라고 하면 장사꾼들끼리 서로 연결해서 물건을 부친 다음 혜산으로 와요. 그러면 돈을 건네 주고 물건을 받으면 돼요. 이렇게 회전해요. 그리고 중국 물건이 많기 때문에 장마당 가면 장도 크고, 평성 장마당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크다고 해요. 혜산 장마당도 커요. 장마당에 가 보면 어느 것 사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물건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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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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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다 중국에서 들어오고 유엔에서 지원해준 유니세프 우유가루가 들어오기도 했어요. 많이 들어왔어요. 우유가루에 “F100(에프백)”이라고 써 있더라고요. 소아 병원에 많이 들어오더군요.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병이 오는데 영양제를 먹지 못하니까 수액을 놔요. 그런데 돈이 없는 집은 수액도 못 맞아요. 병원이라고 해도 영양제가 없어요. 병원에 가면 오직 포도당밖에 없죠. 영양제라고 하면 단백질, 아미노산이지 않나요? 그런 것을 공급하는 과장이 제 지인이었어요. 하루는 제 아이가 말하는 게 “엄마, 그 집에 가니까 F100을 풀어 먹더라.”고 하더라고요. 우유가루는 원래 소아병원과 고아들 있는 육아원에 공급되는데 간부들은 행표 7개가 있다면 5개를 주고 2개는 받은 것으로 행표 처리한 뒤 뒤로 빼돌려서 자기네들이 먹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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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3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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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받은 쌀은 군수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돌아갔어요. 쉽게 생각해서 총과 폭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잘 먹어야 무기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에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혜택을 받을 수 있었어요. 또한, 웃긴 점은 국제사회에서 지원받은 쌀이 장마당을 통해 많이 돌았어요. 간부들이 유엔이나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받은 쌀과 식량을 중간에서 빼돌렸고 장마당을 통해 팔았던 것이죠. 유엔 과자도 장마당에서 구할 수 있었어요. 원래 어린이를 위해 지원된 것이지만 간부들이 빼돌려 판 것이죠. 아이들에게 아예 안 돌아간 것은 아니에요.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일반 주민들도 국제사회에서 지원해 준 쌀과 과자를 장마당에서 사 먹을 순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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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자강도 만포시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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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지원에는 동의해요. 동의하는데, 식량을 정부에다가 그냥 주지 말고, 제가 어떤 방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엔에서 직접 들어와서 직접 주기는 힘들겠지만 실제 100톤이 들어왔다고 하면 다만 못 해도 주민들 손에 20~30톤이라도 돌아가게끔 해 줬으면 해요. 정부에 주면 그거는 주민에게 돌아가지 않아요. 그게 전쟁 준비라고 해서 2호, 3호, 4호 창고 같은 게 있는데 거기로 다 들어가요. 거기는 전쟁 물자를 보관하는 곳이에요. 올해 농사 지은 것은 새로 창고에 넣고, 전에 있던 것은 다시 빼고 그런 식으로 회전해서 넣어 보관해요. 유엔이나 어디에서 쌀이 들어간다고 하면 일단 그 창고로 들어간 다음 쌀이 썩기 전에 필요한 곳에 쓰고 그래요. 북한으로 외국의 쌀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게 100% 주민에게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줄 것이에요. 하지만 돈을 주는 것은 안 돼요.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봐요. 돈 주면 그건 무조건 핵 만들라고 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차라리 식량을 주는 게 나아요. 식량은 못 팔아먹을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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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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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강도다 보니 감자 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그래서 주식은 감자를 많이 넣고 거기에 쌀 조금 넣어서 만든 감자밥이죠. 거기에 반찬은 자기가 직접 농사 지은 남새(야채)로 만들어 먹었어요. 김장도 자기가 농사 지은 걸로 했고요. 다 자기가 심은 걸로 만들어 해결했어요. 하지만 고기는 없어요. 고기 같은 것은 명절 때, 생일 때, 손님이 오거나 하는 등 계기가 있을 때나 사 먹었어요. 평시에는 비싸니까 못 먹었어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못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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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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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먹을 것이 흔하지 않으니까 음식이 쉬어서 버리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하루 벌어 하루 살다 보니 하루에 만든 것은 바로바로 먹는 거죠. 고기는 못사는 집은 한 달에 한 번도 못 먹어요. 일반적으로 사는 사람도 한 달에 고기를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해요. 보통 돼지고기를 먹어요. 돈 있는 사람들은 염소고기, 양고기를 먹고요. 개고기나 닭고기는 집에서 개와 닭을 키우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고기는 조금 흔해요. 가격으로 봤을 때 염소고기와 양고기가 제일 비싸고, 개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순이에요. 사람들이 개를 많이 키워요. 북한에서는 개를 잡아먹으려고 키우거든요. 그렇다고는 해도 자기가 키운 개는 자기가 잡아먹지는 않아요. 예전만 해도 길에 개가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생활이 조금씩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이 개를 막 잡아먹으니까 이제는 집에서 목줄을 해 놓고 길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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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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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은 감자 반찬, 콩나물 반찬, 인조고기 반찬 등 여러가지가 있어요. 주로 다 그런 거죠. 시내에서는 이렇게 먹어요. 인조고기는 콩 기름 쫙 짜고 남은 그런 거, 쭉 길게 나오는 거가 있는데 그거예요. 기름도 개인이 다 짜니까요. 그걸 팔아요. 그걸로 반찬도 만들어 먹고 해요. 여기 한국에서처럼 영양에 맞게 먹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저 먹는 게 다행이니까요. 먹고 싶은 거 먹는 사람이 제일 잘 사는 사람이에요. 영양을 따지고 뭐 그렇게 먹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평양 같은 곳 가면 잘 사는 계층은 영양을 따져요. 제가 평양에 다녀봤는데 평양에 잘 사는 집에 가면 밥도 손가락 오므린 만큼만 먹더라고요. 평양에서 진짜 잘사는 사람들은 여기 진짜 잘 사는 사람들과 맞먹어요. 밥에도 빠다(버터) 그런 걸 툭툭 넣어서 먹더라고요. 밥도 딱 두 숟가락 정도고요. 그거 입에다 탁 넣고 여러가지 간식, 반찬 탁탁 먹고 그러더라고요. 물론 평양도 빈부 격차가 있어요. 차이가 엄청 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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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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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식량을 알곡으로 환산한다고 했을 때 한 해에 1인당 알곡 150~160kg이 필요해요. 하지만 농장원 같은 경우는 알곡을 입에 대 볼 수조차 없어요. 왜냐하면, 군량미 같은 것을 국가에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은 감자밖에 없기 때문이죠. 즉, 농장원들이 가질 수 있는 게 감자밖에 없는데 이것도 제 경험상 최고 많이 받았던 게 2개월분이었어요. 1년 중 나머지 10달 이상은 자체적으로 알아서 살아야 했죠. 제가 살던 지역 주변 산에는 나무가 없었어요. 전부 벌거숭이였죠. 주변 산을 몽땅 갈아엎어서 소토지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소토지에서 감자랑 콩을 심어서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어 먹었어요. 아마 소토지라도 없었으면 다 굶어 죽었을 것이에요. 농장일이 끝나면 바로 자기 소토지로 온 가족이 함께 달려가요. 밤 늦게까지 불을 켜서라도 일을 하는 거죠. 어두워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아도, 태양열로 충전한 작은 손전등을 가져가거나 밭 옆에 모닥불을 피워서 어떻게든 일해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농장원 가족들이 다 그렇게 살았어요. 농장일도 힘든데 소토지까지 하려면 정말 힘들어요. 일하다 보면 입안에서 거품이 막 나올 정도죠. 그래도 대다수는 악으로라도 버티면서 해요. 소토지라도 안 하면 굶어 죽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농장원은 장마당에서 장사할 수 없어요. 장사하기라도 하면 "이 새끼, 너 농사질도 못하는데 장사하냐?"라고 하며 체포하기도 해요. 사실, 농장원이 장사한다고 해도 뭘 가지고 장사를 하겠어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보니 그래요. 그나마 수확한 강냉이나 콩을 메고 100리씩 나가서 한 번씩 필요할 때마다 입쌀이랑 바꿔오는 수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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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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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겪으면서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고 했는데, 지금 한 20년 넘게 흘렀잖아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아, 장마당에 나가서 뭔가 움직이던가 활동을 해야지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노동자의 경우에는 직장을 일단 나가서 시간을 받아요. 직장에 돈을 주는 대신 이름만 걸어 놓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죠. 그렇게 한 후 노동자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잡이할 사람은 고기를 잡고 그걸 파는 방법으로 이렇게 자기가 살아가는 투쟁을 해요. 농촌 지방이라고 하면 시간을 받으면 농장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산비탈에 가서 자기 소토지를 일궈요. 만약, 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시간을 받으면 장마당에 가서 자전거나 구루마를 가지고 장사꾼들 짐도 날라주고, 개인 집 수리하거나 공사판 같은 곳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받고 그런 각종 노동력 파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요. 북한 말로 하면 ‘개인 이기주의 할 생각’을 하는 거죠. 하루에 1천 원을 벌든, 5천 원을 벌든 자기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을 해요. 그렇게 쌀도 사고 돈도 저축하고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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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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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지만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은 여전히 있어요. 남자들은 여자를 존대하지 않아요. 가정의 경우 여자가 벌어서 살림을 살아가는데 남자들은 함께 도와준다고 하기 보다는 술 먹고 여자들을 힘들게 하고, 천대하고, 폭행하고 그래요. 북한에서는 이혼이란 것도 힘들어요. 이혼은 뇌물을 써도 하기 힘들죠. 그러니까 여자들끼리 앉아서 ‘야… 이 북한여자들처럼 정말 불쌍한 것도 없다. 세상에 여자를 이렇게 천대하고 이렇게 부려먹는 나라는 더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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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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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외적으로는 남녀평등권을 채택한 지 오래고, 정부에서도 교양도 하고 그런 사업을 하곤 해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성의 지위가 너무 낮게 머물러 있어요. 특히, 가정이라든가 그런 곳에서는 낮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많이 바뀌고 있기도 해요. 왜냐하면 남성의 역할이 많이 줄어들고 있거든요. 기존에 정부 배급제가 살아 있을 때는 남성이 나가서 일을 하면 와이프는 부양으로 해서 그냥 먹고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배급이 안 되잖아요? 배급이라는 인프라가 거의 다 허물어져 버리고, 정부에서 주는 배급으로 살기에는 불가능하다 보니까 여성들이 이제는 많이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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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청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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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대학원에서 여자를 잘 받지 않았어요. 안 받았던 이유는 여자를 받으면 금방 결혼하고 육아하고 하다 보니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러다 보니 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를 시켜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자는 유학도 별로 내보내지 않아요. 대학에서 우수한 학생들은 중국이나 인도나 그런 곳으로 유학을 보내는데 그럴 때 여자는 많이 안 보내요. 그리고 특별히 공학 수재반 이런 것을 설립할 때도 여자는 안 받더라고요. 나라에서는 여자와 남자에 투자를 해서 공부를 시켰을 때 여자는 가성비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여자라서 지원을 못 하고 그런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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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무산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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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원(공무원) 하려면 당에 잘 보여야 해요. 남자의 경우 군 복무를 해야 하고, 대학을 나와야 하고, 당원이어야 하죠. 여자의 경우 조금 편리한 게 무엇이냐고 하면, 군 복무를 했는데 여자 당원이라고 하면 조금 많이 더 내세울 수 있어요. 대학까지는 안 나오더라도 당원이면 우리를 당에 충실한 준비된 사람들로 보고 지도원을 하게 해 주죠. 여자 당원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여자들을 내세워주곤 해요. 여성들이 당원이면서 집에서 남편 밑에서 부양으로 있다 하더라도 군대 갔다 오고 자격이 되는 여성들은 당에서 간부사업을 해서 일을 배치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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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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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도 정복을 입고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게 있는 사람에게는 얕잡아보고 그런 거는 없어요. 성별을 떠나서 보위원이고 보안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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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5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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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반도 동원이라고 해서 어느 날 할거 없이 매일 나가 일하곤 했어요. 인민반 사람들 자체가 "아, 이거 로동단련대구나!" 이렇게 말할 정도였죠. 북한은 기계설비가 없고, 전기가 없고, 연유(기름 연료)도 부족하다 보니 몽땅 사람들이 다 해야 해요. 돌을 날라도, 모래를 날라도, 나무를 날라도 사람이 직접 다 해야 하죠. 그래서 인민반 인력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힘든 일은 인민반으로 다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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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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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대부분 남성들이 권력을 쥐고 있어요. 그리고 워낙 인권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나라이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들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잘 보여야 해요. 일을 하나 해도 남성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자기 성을 내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이 충족되니까, 그게 좋아서 응한다기 보다는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라든가, 어떤 것을 해결하거나 얻기 위해서 성 접대를 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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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옹진군
- 여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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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남편에게 폭행당해도 북한은 신고하고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남자들은 술 먹고 그저 자기 여자를 마음대로 때려요. 우리 옆집에도 남자가 술 먹고 계속, 매일 집에 들어와서 여자를 못살게 구는데 너무 많이 때렸어요. 하다못해 제가 나가서 ‘야이 개간나, 이 개새끼 너도 좀 맞아봐라. 이 새끼야, 술 처먹고 와서 잘 것이지 니가 뭐라고 여자를 그렇게 두들겨 패냐? 야, 걔가 너한테 매 맞으려고 시집간 줄 아니? 이 개 같은 새끼’라고 그 남자한테 욕하곤 했어요. 북한에는 술 마시고 그렇게 폭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나가면서 보안원이 봐도 ‘야이 개새끼야’ 하고 넘어가요. 남자들이 강간하고 그러면 잡아가긴 해요. 그러나 뇌물만 주면 내보내 버리죠. 돈이 없는 힘 없는 사람이나 감옥을 가지, 웬만하면 뇌물 주고 그냥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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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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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서로가 동의를 하고 파는 것도 인신매매라고 해요.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는 브로커들은 다 인신매매를 한다고 보면 되는 거죠. 요즘에는 다 저처럼 자발적으로 넘어가고 싶어서 자기가 줄을 찾는 사람들이에요. 브로커를 알아보고 자기가 줄을 놔서 하는 사람들이죠. 지금은 다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넘어가는 거지, 옛날처럼 그렇게 속여 넘기고 것은… 그건 한 몇십 년 전에나 있던 일이에요.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에나 있었을까요? 돈 벌게 해준다며 강제로 넘기고 그런 건 옛날에나 있었던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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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경원군
- 여
- 1970년대 출생
- 199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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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 번 팔려간 적이 있어요. 저와 알고 지냈던 친척 뻘 되는 사람이 저를 다른 사람에게 판 것이죠. 저를 속였어요. 산을 넘고 넘어서 그런 곳으로 팔려 갔어요. 작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저는 ‘어디를 가도 나는 돌아올 것이다’고 생각했죠. 도착한 곳은 산 속에 정말 힘들게 사는 곳이었어요. 물어보니까 제가 당시 중국 돈 1만 2천 위안에 팔렸더라고요. 그런데 그 집에서는 저를 결국 내보내 줬어요. 왜 그런가 하니, 제가 당시 병원에 갔는데 중요한 장기가 다 안 좋다 보니까 저를 데려와 봤자 일도 못하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보통 노동력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북한 여자들을 사 온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중국 남자들 중에 결혼 못 한 사람에게 팔려가는 경우도 있고요. 어떤 곳에 가는가에 따라 북한 여자의 인생이 달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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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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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탈북 과정에서 죽을 뻔했어요. 탈출하면서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한데 발을 잘못 헛디뎌 발목을 접질렸어요.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었으나 어찌어찌 중국 쪽에 겨우 도착했어요. 중국 쪽 산 속으로 들어가자 길을 안내해줬던 브로커 2명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하며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냥 떠나 버렸어요. 저는 브로커들이 돌아올 때까지 5일을 산 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 한 채 혼자 보냈어요.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상태라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죠. 5일을 오도가도 못하고 그렇게 버티고 있었는데 북한 보위원들이 절 잡으러 왔어요. 그렇게 중국 땅에서 북한 보위부에게 붙잡혔어요. 그래서 다시 북송되었죠. 북한 보위원들은 중국으로 나와서 탈북한 북한 사람들을 잡으러 다녀요. 흔한 일이에요. 중국 변방대가 없는 곳으로 북한 보위부가 다니며 탈북한 사람들을 수색하곤 했어요. 저는 보위부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보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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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삼지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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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쪽에 들쭉을 따러 간 적이 있어요. 워낙 넓고 큰 나무도 없다 보니 북한과 중국 경계가 제대로 구별이 안되요. 들쭉 나무는 무릎 정도 높이밖에 안되죠. 들쭉을 따다가 길을 잃었어요. 누군가 다가와서 여기는 중국이라고 말하더군요. 알고 보니 중국 변방대 군인들이었어요. 변방대에 붙잡혔으나 우리는 들쭉을 따다가 길을 잃어서 중국까지 넘어온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어요. 중국 쪽에 하루 머물고 백두산 쪽에 있는 북한 국경경비대에 인계되었죠. 그때 국경경비대에서 중국으로 돈을 벌 목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힌 사람들을 봤어요. 그 사람들은 목적을 가지고 국경을 넘은 것이었어요. 우리와 달리 그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어요. 붙잡힌 사람 모두 국경경비대에서 담당 보안서로 이송되었어요. 보안서에서는 그 사람들을 정말 인정사정없이 때렸어요. 손, 발, 가죽 벨트로 마구잡이로 때렸어요. 그 중에는 나이든 사람도 있었죠. 피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맞는 장면을 보고 너무 놀라서 '절대 죄를 짓고 살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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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라선특별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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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쯤 지하에서 활동하는 종교단체가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들었어요. 라선에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 사람들인데 북한 당국이 검거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퍼트린 것으로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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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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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전혀 없어요. 있을 수 없어요. 천주교는 아주 드물지만 있어요. 기독교와 달리 천주교는 무자비하게 탄압하지는 않아요. 제 본가 집에 있을 때 이웃 여자가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 시집을 갔다고 들었어요. 이 내용을 들을 때 저는 천주교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어요. 아무튼, 그 사람이 시댁에 갔는데 물을 떠놓고 기도를 한 후 밥을 줬다고 했어요. 당시 그 여자는 젊은 사람이다 보니 그런 모습이 처음이라 그런 것이 싫어서 도망쳐 왔다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내용을 신고했고, 시댁 사람들이 처벌받았다고 들었어요. 큰 처벌은 받지 않고 노동단련대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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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김정숙군
- 여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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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 있었을 때 미신 믿은 사람을 처형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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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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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타고 가던 열차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그 후로 반신불수가 되어 몸 반쪽에 마비가 왔어요. 그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 해요. 그 이후로는 장애인으로 살았죠. 북한은 한국과 달리 장애인에 대해 어떠한 혜택도 없어요. 뭐, 장애인이라고 차별받고 그런 것도 없었지만요. 저도 장애인이었지만 돈만 있으면 장마당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근심없이 산다고 부러워했어요. 돈 있으면 대우를 더 잘 받았기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차별을 받은 적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일반인이나 장애인이나 그냥 똑같았어요. 장애 있는 사람들도 다 어떻게든 살아가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저도 집 앞에서 매대를 하면서 술, 담배를 팔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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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단천시
- 여
- 196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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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들은 수용한다고 들었어요. 난쟁이촌이라고 있는데 거기 난쟁이들을 몰아 놓고 자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한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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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70년대 출생
- 2013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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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세 끼 먹었어요. 잘 먹었다는 말은 아니에요. 배가 고파도 그때는 불만을 가지기 보다는 현실로 받아들였죠. 식사는 옥수수를 섞은 쌀밥에 염장무(소금에 절인 무)가 전부였어요. 규정상으로는 식사 계획표라는 게 있고 매 끼 3가지 반찬이 제공되는 것으로 되어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은 염장무 하나 밖에 없었어요. 간혹 다른 반찬이 나오기도 했어요. 반찬으로 나오는 채소는 모두 부대 자체적으로 수확한 것들이에요. 사실 군에서 사용하는 식량의 양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제대로 걷어가고 제대로 사용하면 식량이 부족할 리가 없어요. 그런데 중간에서 간부들이 식량을 다 빼돌려요. 제가 군생활을 하는 동안 군인들 중 영양실조에 걸려서 군대 생활을 할 수 없는 자들이 많이 늘었어요. 남자 군인과 여자 군인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생활을 해서 남자 군인들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여자 군인들은 영양실조에 많이 걸렸어요. 여자가 영양실조에 걸리면 정말 못 봐줄 만큼 끔찍해요. 신기했던 점은 같은 양의 밥을 먹는데도 어떤 사람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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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보천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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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0년 복무하는 돌격대에 있었는데 이곳은 복무하고 나면 군복무 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돼요. 여자의 경우 6년을 복무해요. 군 복무랑 똑같아요. 여자는 보통 18세에서 24세까지 있는다고 보면 돼요. 구타는 많이 당해요. 저는 일 때문에 구타를 당해 본 적은 없어요. 도망을 많이 쳐서 구타를 당하기는 했지만요. 탈출하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탈출하다 잡히면 보통 매로 맞아요. 전문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어요. 돌격대 여단이 크다 보니 너무 많은 애들이 도망가고 그래요. 그래서 걔네만 잡으러 다니는 애들도 있는 거죠. 지휘관한테 맞은 걸 신고해도 걔네들도 자기일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그런 곳에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아요. 매 맞아도 자기 불찰, 다쳐도 자기 불찰이에요. 안 맞게끔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참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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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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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신고를 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만 거기는 그런 게 없어요. 보안원들이 제대로 수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신고 받는 사람들도 결국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냥 다 덮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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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강원도 원산시
- 남
- 1960년대 출생
- 2017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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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를 할 수 있긴 해요. 하지만 해도 전혀 받지 않아요. 형식상이나마 ‘신소함’이라는 것이 보안서나 시 인민위원회(시청)에 있어요. 거기에 신소 내용을 적은 종이를 넣으면 되는데 넣어 봤자 위에서 처리하려 하지도 않아요. 한국은 민원을 제기하면 바로 처리가 되던데 북한은 그런 것이 없어요.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신소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 해요. 저 같아도 만약 보안원에게 맞는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신소할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이해가 잘 안 가겠지만 북한 사람들 인식이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당에 반대한다는 것은 절대 상상할 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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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여
- 199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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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약 도당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면, ‘간부과’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돈을 고이면 들어갈 수 있어요. 돈이 있거나 빽이 있거나 이러면 좋은 곳에 들어갈 수 있어요. 힘들게 사는 분들은 그런 상황에서 선택을 할 수가 없어요. 북한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부분을 보고 말하는 것이라고 봐요. 자신이 힘들게 살아서 빽이 없거나 그런 사람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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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평안남도 문덕군
- 여
- 197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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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는 있는데 제가 어떤 인권을 가지고 있고 인권을 존중받으려는 생각을 감히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인권 개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요. 단어는 들어봤지만 무슨 내용인지 몰라요. 그래서 북한이 인권 유린 지대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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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량강도 혜산시
- 남
- 197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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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길 가다가 어린이 보호구역도 있고, 차로 조금 가다가 또 어린이 보호구역이더라고요. ‘야! 여기야 말로 인민대중중심주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북한은 막말로 정말 막 살기 좋은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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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북도 회령시
- 남
- 2000년대 출생
- 2018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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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에요. 학교를 가지 않으면 처벌은 있으나 학생이기에 크진 않아요. 처벌이라고 하기 보다 ‘생활총화’를 받아야 해요. 생활총화에서 자기비판을 하면서 잘못이 있다고 반성해야 해요. 굳이 처벌이라고 하자면 학교 청소 정도가 있어요. 옛날에는 처벌을 받으면 학교를 다시 가야 한다고 그렇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뇌물이 강해서 뇌물만 주면 고등학교 안가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어요. 뇌물은 보통 있는 일이에요. 그런 일이 진짜 많아요. 학생이 100명이고 20명이 잘사는 집 애들이라면 20명 거의 다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런 애들은 학교 안 나가요. 학교 수업이 부실하니까요. 여기(한국)로 말하면 학원인데, 북한말로 하면 가정교사라고 해요. 예전에 대학교수 같은 거 하다가 은퇴한 사람이 학생들에게 돈 받고 자기 집에서 교육시켜주는 거죠. 학교보다 여기가 더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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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함경남도 홍원군
- 여
- 1980년대 출생
- 2016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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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한국처럼 무조건 공부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이 없어요. 그런 문화가 없다고 보면 돼요. 여자는 학교 졸업하면 장사 잘하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여자들이 졸업한 여자들보다 더 많아요. 그런데 진짜 이유는 돈 때문이에요. 제가 아무리 공부하고 싶다고 해도 대학에 들어갈 경우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 진학이 불가능해요. 공식적으로 학비는 무료예요. 하지만 기숙사비에 교수에게도 뇌물조의 돈을 줘야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요. 말이 무료라고 하지 비공식적으로 내야 할 돈이 많아요. 이건 대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도 비슷해요. 북한에서는 매달 내는 돈을 월사금이라고 해요. 근데 학교에 다니면 매일 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일사금을 낸다.”는 말로 이런 것을 비꼬아 말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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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
- 황해남도 과일군
- 남
- 1990년대 출생
- 2019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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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학생들은 작업도 해야 해요. 작업이 세요.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거의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에요. 북한 대학생들은 보통 오전에 강의 3개를 들어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있어요. 오후 1시부터 2시 반까지는 점심시간이에요. 그리고 2시 반에 모이면 그때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 가서 일하는 등 동원(노력동원), 순 작업이에요. 오후부터는 무조건 작업인 거죠. 어디서 큰물(홍수) 피해가 났다고 하면 거기로 또 동원 가야 해요. 뭐 어쨌든, 대학생들은 강의라고는 오전에 앉아서 하는 강의 3개 빼고는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오후에 독서실에서 책을 보든가, 자습하든가 그런 것은 꿈도 못 꾸는 거죠. 그럴 시간이 없어요. 오후 동원을 나갔다가 오면 빨리 끝나야 저녁 8시~8시 반이에요. 작업과제가 적으면 7시에 끝나기도 해요. 그때 집에 가봤자 대충 얼굴이나 씻고 밥 먹고 하면 사람이 생리적으로 졸리다 보니 앉아서 공부할 수도 없고 바로 자요. 또 그렇게 아침 6시 되면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죠. 학교 가서 강의 듣고 또 오후에는 삽질하고 까베르(케이블) 깔고 일하고… 남녀 상관없이 대학생들이라면 다 해야 해요. 작업과제가 많으면 할당된 일이 많아도 무조건 끝내야 해요. 작업과제가 많으면 그걸 무조건 끝내야 집에 갈 수 있는 거죠. 밤 10시든 11시든 끝내야 갈 수 있어요. 자기에게 할당된 분량은 다 처리해야 해요.